내 머리 속의 지우개(막8:22-30)
김 노아 목사
어느 날 길을 지나가는데 30~40년 전 노래가 귓가에 들려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도 모르게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르지도 않았는데 그 노래 가사를 하나도 틀리지 않고 따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아마 나는 천재인가 봅니다. 그리고 나를 천재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들이 그렇게 기억이 다 난다면 천재가 맞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것들은 얼마나 많이 잊어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잊고 사는 것들이 무엇이 있는가?’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혼 전 제 아내가 되기 전 집사람을 보면서 설렜던 감정을 잊어버렸습니다. 부쩍 커버린 자녀들을 보면서 그들의 기저귀를 갈아주던 그 감격들을 잊어버렸습니다. 손꼽아 생각해 보니 나를 행복하게 하였던 많은 순간들을 잊고 살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것들이 변하여 현실이라는 굴레 속에서 변질되어 원망이나 분노가 되기도 하며 다른 형상으로 남아 있는 경우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아름다운 기억들은 날마다 새롭게 기억나게 하시고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기억들은 모두 망각하게 하여 주소서”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이 한 맹인을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옵니다. 언제부터인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적을 베푸는 사람이나 병을 고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람들을 데리고 올 때마다 놀라운 이적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것들로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적이 일어나는 그 모습만 기억할 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하는 것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치유행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이며 그가 그리스도임이 드러나는 역사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시146:8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사29:18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35: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가 그리스도의 때로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치료하시면서 당시 눈에 질환이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눈에 침을 바르시고 눈을 낫게 하셨는데 본문의 맹인의 경우에는 점차적으로 치유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는 사람이 보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무같은 것이 걸어 다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된 사람이 아니라 오랫동안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백내장과 같은 병에 걸린 사람이 오랫동안 치료를 받지 못하면 앞을 못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사람과 나무의 형상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전에 보았던 기억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예수님은 그의 행동이 이전과 아무런 연관이 없거나 독특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말씀의 성취이며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심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생각하기를 싫어하거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왜곡하여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사람을 보면서 걸어 다니는 나무를 보듯이 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광야에서 먹이신 예수님을 목격하고서도 떡 한 조각을 보고 근심하는 제자들이 지금 소경이 눈을 뜨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바라보아야 하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막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이미 막7장에서 소경에게 “에바다”라고 외치며 그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경은 그들이 직접 데리고 온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이어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은 참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는가? 라는 질문과 함께 베드로 자신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의 고백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그것은 말에 의한 것은 아직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전4:20). 그 능력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의 사역의 완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 상에서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이로써 보혜사 성령이 그에게 임하심으로 그가 친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하나님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게 하시며 그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사랑과 미움의 모든 과거들을 다 잊어도 괜찮습니다. 이제 우리의 기억들은 모두가 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소경이 오랫동안 자신의 기억 속에서만 세상을 보고 있었다면 이제는 현실 속에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 현실에 우리 눈으로 보는 것에 있지 않고 우리가 믿는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의 믿음에서 세상을 보는 눈입니다. 그 눈이야 말로 거짓과 위선에 싸여 있는 세상을 희미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뜻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가시는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함이요 이를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며 그 믿음을 가진 자들은 참된 새언약인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나의 기억은 지워도 그가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의 믿음은 지우지 못하는 것은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나타남이며 우리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기억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 능력 안에서 다스림을 받고 삶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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