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라는 명제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아니라면 모두 동의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성경들은 목사님들마다 다르게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조차도 목사님의 말씀이 모두 옳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특정 계층만이 해석할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성경을 읽는 사람이 자신의 현실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경기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때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다시 하자면 성경은 본래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왜곡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다.
성경 본문을 하나씩 살펴봄으로써 성경을 올바로 읽고 해석하는 방법을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다.
학생부 시절부터 많이 듣고 연극으로 많이 사용하였던 구절 중의 하나가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후의 탕자의 비유의 말씀이다.
탕자는 언제나 우리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고, 아버지는 언제나 자비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기에 은혜가 넘친다. 얼마 전에는 주일학교의 한 학생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목사님,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제일 싫어 한 것은 누구일까요?” 물론 웃자고 하는 넌센스 퀴즈였다. 고지식하게도 나는 “글쎄, 형이 아니겠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에~, 틀렸어요, 살찐 송아지예요”라고 대답하자 주변의 성도들은 모두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글을 읽는 독자들을 향하여서 내가 질문을 해 보겠다. 탕자의 비유를 연극이나 영화로 하나님이 제작하셨다면 누구를 주인공으로 세웠겠는가? 하나님이 제작자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질문을 하자. 만약 여러분들이 제작자가 된다면 여러분들은 누구를 주인공으로 삼겠는가?
자신이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하고 있는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난 다음 이후에 서술되는 글을 읽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세운 인물과 자신이 인물로 세운 인물이 동일한가? 아니면 다른가? 동일하다면 그 사람은 고지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르다면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 해석에 있어서는 창의적이어서는 안 된다. 성경해석을 창의적으로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기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난 은혜로운 설교 가운데서 형이 주인공이 되고 종들이 주인공이 되는 설교를 들은 적이 수차례 있다. 설교의 내용과 결론은 참으로 은혜로웠다. 하지만 난 그 이후에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이 성경의 본문은 형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요 종들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 비유의 시작은 15장 1,2절에 설명되어 있는데 유대인인 예수님에게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기 위하여 모여 들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죄인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 일상의 관습이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당시의 종교지도자 그룹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의를 제기한데서 비롯된다. 즉, 예수님이 왜 서기관과 바래새인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죄인들과 함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비유의 말씀이 탕자의 비유 하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잃은 양과 드라크마의 비유와 함께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이 모든 비유들이 연관성이 있으며 하나의 결론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는 양이 주인공이 아니라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오는 목자이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의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의 동전이 초점이 아니라 그것을 찾고 잔치를 벌이는 한 여인에게 주목되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탕자의 비유도 잃어버린 아들이 아니라 그 아들을 기다리고 맞이하는 아버지에게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대상자들 가운데 죄인과 함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생각해야 한다.
말씀의 대상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그리고 죄인들이다. 하지만 말씀의 핵심은 의롭고 자비하신 하나님이다. 다시 말해 이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너희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잃어버린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느냐?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누가복음 5장 32절의 말씀과 같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는 말씀이며 누가복음 15잘 7절과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면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로 말하는 것이 옳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느냐 은혜만 받으면 됐지”하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엄청난 차이를 유발하게 되는데, 탕자에게 초점을 맞추게 되면 그가 집을 나가서 쾌락과 함께 하다가 모든 것을 잃고 돌아가기로 결심하는 과정까지 리얼하게 설명되어지게 된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기를 우리도 탕자와 같으니 죄의 길에서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속히 돌아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앞의 비유에서는 양은 스스로 돌아오지 않았고 동전은 자신을 찾아 달라고 스스로 빛을 발하지 않았다.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지금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이유가 탕자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이와 같이 죄인하나가 회개하면...”이라고 하신다. 양을 찾는 일은 목자가 하였으며, 동전을 찾은 것은 잃어버린 여인이 한 일이고 탕자를 기다리고 맞이한 것은 아버지가 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죄인하나가 돌아오면...”이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해 주인이 직접 찾으시는데 죄인이 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이 스스로 죽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리고 지금 죄인들과 함께 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목자요 한 여인이며 아버지의 모습이다.
성경에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그 본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전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와 교사 그리고 이단들이 난무한 현 세대를 분별하는 능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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