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온라인주일설교

지옥에서 온 편지/부자와 나사로

지옥에서 온 편지/부자와 나사로/누가복음 16장 19-31절




“내가 이러려고 부자가 되었나?”

지금 지옥에 있는 부자가 하는 말 일겁니다.


이 비유는 돈을 사랑하고 향락을 추구하며 성경을 자기 맘대로 왜곡시키는 바리세인을 향하여 하시는 현세적인 말씀입니다(눅16:14).


그런데 누군가는 이 말씀을 통하여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자 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기 전에 결혼에 대한 말씀을 먼저 한다.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눅16:18).”


이 전제의 말씀은 결혼은 평생토록 지속되도록 제정된 것이지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바리새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영원한 결혼제도를 자신들의 편리한대로 이혼의 정당화를 위하여서 왜곡시켜 해석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너희들이 계속 그렇게 한다면 이런 결과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부자여서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부자로서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부자의 눈에는 적어도 가난한 나사로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 밖에 있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자기 집 대문 앞에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만 바라봅니다.

그 가운데서도 자신과 연관된 것이 아닌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나 함께 누리는 나라이지 차별과 억압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율법이 주어짐도 모두가 참된 안식을 누리기 위함이요. 그 안식은 본래 나그네 되었던 이스라엘을 그 억압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을 자신들의 지위와 신분을 유지하고 자신들의 육체적 향락을 위해 오용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하나님의 관심은 율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난하거나 소외되는 자들이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에게 관심이 없었던 부자는 지옥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 놓여있습니다. 더 이상 기회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지옥에 있는 것은 아무도 그렇게 될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아직 이 자리에 오지 않은 자신의 다섯 형제에게 나사로를 보내서라도 그 결과를 알려주어야 한다고 애원합니다.

“난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왜냐하면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난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렇다 치고 나에게 다섯 명의 형제가 있으니 그들은 나와 같은 결과에 이르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대답은 그가 원하는 것과는 상이했습니다.

그가 그의 결과를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귀를 막았고 눈을 가렸던 것이지 그가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대답에 부자는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말을 해 주었단 말인가?


바로, 모세와 선지자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자들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선생들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을 상징하고 있다.

모세오경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향해 어떻게 행할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 그것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십계명이다. 이것은 개인의 삶보다는 이스라엘 전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의 율법은 악한 자와 법적으로 기댈 곳이 없는 자들을 향하여 동정과 자비를 보여준다. 이러한 율법은 하인들과 종들과 포로 된 자들과 과부들과 고아들과 나그네들과 외국인들과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고 보장해 준다.


출22:26-27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신24: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응답으로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 자체가 죄라기보다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속량 받기 전에는 그들도 나그네였고 객이었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방법은 이방과 객들을 향해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


출22: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음이니라.”


왜 부자는 가난한 나사로를 향하여 긍휼을 베풀어야만 하는가? 한 때는 이라스엘 자신들도 가난하고 굶주렸으나,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고 돌보아 주셨기 때문이다.


신15:7-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모세와 선지자의 메시지는 동일한 내용이었다. 언약의 율법을 순종하라.


사1:16-17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선지자들은 언약을 새롭게 상기시키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약의 테두리 안에서 사는 길이 생명이며, 그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부탁한 것에 대한 대답으로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자는 변명을 늘여 놓으며 “율법과 선지자들로서는 충분치가 않습니다. 나에게 충분하고 적절한 경고만 주어졌었더라도 나는 나사로를 잘 돌보아 주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율법과 선지자들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신명기 15장 4-5, 7-8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저 세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마땅히 살아야 하는 것은 율법과 선지자를 통하여 인도 받을 수 있으며, 그 인도를 받을 때 사망이 아니라 생명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살아가던 이들이었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소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소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들에게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현세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참된 의미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다른 어떤 단체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지의 일선에서 힘써 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에 화답하는 당연한 행동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주변을 돌보기는커녕 부동산 늘리기를 비롯하여, 교회를 세습하고 기득권의 자리를 탐하여 부정한 정부와 편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재벌의 편에 서서 스스로 살찌우는 형태를 보이는 것은 결국 자신의 욕심에서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십자가의 모형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이 땅에서 그가 누릴 것은 다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심판이 그들 눈앞에 있다는 것을 지옥에 있는 부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부자로 살다가 죽어도 천국 가서 영원히 부자로 산다고 말했습니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는 자들입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빚을 갚으며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은 증인으로서의 삶은 가난한 자와 나그네 된 자들을 돕는 현실적인 삶의 형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들의 모습이요.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증인된 삶입니다.


약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