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방
학교가 가르치지 못하는 ‘교육’
김노아
2015. 7. 18. 22:42
[차윤순의 자녀교육] 학교가 가르치지 못하는 ‘교육’
그릇된 교육은 그릇된 생각을 낳고 그릇된 행위로 나타닌다.부모 자신이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그릇됨이 없는 인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그러지 못할 때 결코 자녀를 올바로 교육할 수 없다.자녀를 키우기 위해 부모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을 아는 것이다.사람을 바로 알지 못하는 부모가 자녀에게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쳐 줄 수는 없다.
높은 학력을 가진 부모에게서 양육받는 아이들은 옛날 사람보다 뛰어난 정신세계와 인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그러나 사실은 그와 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이를 볼때 학교교육만을 통해서는 올바른 인간관과 가치관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 이유가 몇가지 있다.
첫째,학교교육이 진화론적 사상에서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진화론의 인간은 동물에 근원을 두며 오랜 세월을 거쳐 오늘날 인간의 모습은 동물에서 진화된 것이라고 가르친다.인간의 본질이 동물이라면 인간의 가치는 절대적 존귀성을 가질 수가 없다.따라서 인권을 운위하는 것은 모순된 것이다.그러나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생명으로 한 영적 존재라고 선언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한복음 1:1∼4)
이 말씀으로 인간은 말씀이신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할 때 인간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가 된다.
둘째,그래서 학교교육은 강한 자는 우수한 인간이며 약한 자는 열등 인간으로 가르게 된다.머리가 좋은 사람은 잘난 사람이며 머리가 나쁜 사람은 못난 사람이 된다.다른 사람을 제치고 앞장서려는 치열한 경쟁심을 심어줄지언정 강한 자가 약한 자를,잘난 자가 못난 자를 받드는 바른 인간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
셋째,학교교육은 새로운 지식을 좇아 가르친다.진리에는 바른 인간관과 가치관이 있다.진리는 불변의 것이기 때문에 진리 안에 있는 인간관과 가치관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것은 변함없이 새롭다는 것이다.그러나 학교교육은 불과 수년 전의 것도 퇴색한 것으로 여긴다.그래서 학교교육을 통해서 불변의 절대적인 인간관과 가치관은 얻을 수 없다.불변의 가치관과 인간관을 가르칠 수 없는 지식으로는 바른 교육을 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학교교육은 지식과 정보는 전달하지만 자녀에게 가장 필요한 바른 관계를 갖게 해주지 못한다.성경은 십자가를 통해 바른 인간의 가치를 선언한다.“사람의 생명은 창조주시며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생명과 맞바꾸실 만큼 귀중한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어느 종교도 사상도 학문도 가르치지 못했던 인간의 생명 가격표인 것이다.
약하고 못난 사람에게도 십자가는 그 사람에게 천하보다도 귀한 절대적인 가치가 있노라고 선언하고 있다.그러므로 십자가의 말씀이 자녀교육의 중심이 돼야 한다.십자가의 말씀만을 종(縱)으로,하나님과의 관계를 횡(橫)으로 하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를 갖게 해주는 진정한 자녀교육의 길이 된다.
/차윤순<월간 말씀과 생활 주필>
그릇된 교육은 그릇된 생각을 낳고 그릇된 행위로 나타닌다.부모 자신이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그릇됨이 없는 인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그러지 못할 때 결코 자녀를 올바로 교육할 수 없다.자녀를 키우기 위해 부모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을 아는 것이다.사람을 바로 알지 못하는 부모가 자녀에게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쳐 줄 수는 없다.
높은 학력을 가진 부모에게서 양육받는 아이들은 옛날 사람보다 뛰어난 정신세계와 인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그러나 사실은 그와 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이를 볼때 학교교육만을 통해서는 올바른 인간관과 가치관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 이유가 몇가지 있다.
첫째,학교교육이 진화론적 사상에서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진화론의 인간은 동물에 근원을 두며 오랜 세월을 거쳐 오늘날 인간의 모습은 동물에서 진화된 것이라고 가르친다.인간의 본질이 동물이라면 인간의 가치는 절대적 존귀성을 가질 수가 없다.따라서 인권을 운위하는 것은 모순된 것이다.그러나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생명으로 한 영적 존재라고 선언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한복음 1:1∼4)
이 말씀으로 인간은 말씀이신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할 때 인간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가 된다.
둘째,그래서 학교교육은 강한 자는 우수한 인간이며 약한 자는 열등 인간으로 가르게 된다.머리가 좋은 사람은 잘난 사람이며 머리가 나쁜 사람은 못난 사람이 된다.다른 사람을 제치고 앞장서려는 치열한 경쟁심을 심어줄지언정 강한 자가 약한 자를,잘난 자가 못난 자를 받드는 바른 인간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
셋째,학교교육은 새로운 지식을 좇아 가르친다.진리에는 바른 인간관과 가치관이 있다.진리는 불변의 것이기 때문에 진리 안에 있는 인간관과 가치관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것은 변함없이 새롭다는 것이다.그러나 학교교육은 불과 수년 전의 것도 퇴색한 것으로 여긴다.그래서 학교교육을 통해서 불변의 절대적인 인간관과 가치관은 얻을 수 없다.불변의 가치관과 인간관을 가르칠 수 없는 지식으로는 바른 교육을 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학교교육은 지식과 정보는 전달하지만 자녀에게 가장 필요한 바른 관계를 갖게 해주지 못한다.성경은 십자가를 통해 바른 인간의 가치를 선언한다.“사람의 생명은 창조주시며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생명과 맞바꾸실 만큼 귀중한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어느 종교도 사상도 학문도 가르치지 못했던 인간의 생명 가격표인 것이다.
약하고 못난 사람에게도 십자가는 그 사람에게 천하보다도 귀한 절대적인 가치가 있노라고 선언하고 있다.그러므로 십자가의 말씀이 자녀교육의 중심이 돼야 한다.십자가의 말씀만을 종(縱)으로,하나님과의 관계를 횡(橫)으로 하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를 갖게 해주는 진정한 자녀교육의 길이 된다.
/차윤순<월간 말씀과 생활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