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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의 배경/쾌락의 제국 로마

김노아 2013. 11. 2. 15:01

 

 

 

A.D. 4세기 이후 로마제국은 서서히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자들은 안간힘을 쓰며 지나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로마제국을 동, 서로마 제국으로 나누어 지배체제를 바꾸어 본 것이라든지, 기독교를 공인하고 시민법을 버리고 만민법을 시행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 것은 모두 생명력을 잃어가는 로마를 재생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로마제국이 군사적 정복과 약탈에 기초한 경제체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정복은 없음을 선언한 ‘로마의 평화: Pax Romana’ 시대 이후 새로운 정복에서 벌어들인 재정수입이 거의 없게 되자(로마제국은 전쟁에서 이겨 사로잡은 포로들을 노예로 삼아 이들을 로마경제의 생산 및 서비스부문에서 무임금의 노동력으로 썼다. 로마제국의 농학연구서는 노예를  ‘말하는 농기구’로 분류하였으며 이들 노예들은 로마경제의 생산 활동 분야에서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노예 경제체제에 입각한 로마제국은 제국체제 유지의 토대를 사실상 잃게 되었다.

또한 기독교가 로마제국 내에서 용인된 이후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는 기본자세에 큰 변화가 나타나 로마의 사회적 분위기는 건국초기와 공화정 시기의 진취적 태도를 잃었다. 사람들은 당면하고 있던 문제점을 현실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정신적 분위기는 로마가 현실의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힘들고 더러운 일을 하지 않으려는 또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태도를 비아냥거리는 분위기가 A.D. 4세기 이후 로마에 감돌았던 것이다. 이런 세태 속에서 징병제에 기초하여 구성되었던 로마의 군대에 직업군인으로 입대한 야만족 용병들이 주목 받게 되었다. 단순 소박한 삶을 영위하며 성실과 충성의 실천을 위하여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었던 야만족들은 서양 중세를 책임질 게르만 민족이었다.

게르만족은 라틴족인 로마사람들과 외견상 쉽게 구분된다. 게르만족은 몸이 크고, 피부가 희고, 머리칼의 색은 금발이고 웨이브가 졌고, 눈동자는 푸른색을 띄었다. 이와 달리 라틴족은 상대적으로 몸이 작고 피부는 옅은 검붉은 색이고, 눈동자와 머리칼의 색이 검었다. 그러나 로마가 기후 상으로 따스한 지중해 연변에 자리 잡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동안에 원거주지의 게르만족들은 춥고 황량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부근 빙하지역에서 거의 야만에 가까운 삶을 이어 나갔다. 그런즉 게르만족들은 로마의 선진문화에 대한 간절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로마제국이 강성한 동안 게르만족의 염원 즉 로마의 영내에서 살고 싶다는 희망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이들은 로마제국이 설정한 경계선이었던 라인 강 남쪽에 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로마제국의 영내로 들어와 살 수 없었기에 게르만족은 고유한 문화전통을 보존하게 되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부족중심의 문화를 유지하였고 자유민의 상징으로서 칼과 방패 등을 휴대하였고 싸움을 중시 여겼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 시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도록 학의 자태를 닮은 고고한 선비, 인륜을 밝힐 학문 등, 글을 바람직한 사회의 가치로 중시하는 이념이 있으나 게르만 민족을 대표하는 독일의 경우 19세기 말에도 귀족이라면 대학에 다니는 것보다 사관학교를 나와 군대에서 장교로 복무하기를 선호하였다. 철혈 수상 비스마르크 같은 전통 귀족에게 있어 젊은 시절 수 차례 권총결투를 하였다는 사실은 자랑거리 추억담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양반지배층의 경우 누군가와 육체적으로 싸움을 했었다는 경험이 자못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게르만족의 힘에 대한 생각은 우리와는 다른 셈이다. 게르만족에게 힘(Macht)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 게르만 부족회의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은 자기의 무기를 들고 회의에 나갈 수 있는 사람들로 국한되었고 논의된 의견에 동의한다는 표시는 투표가 아니라 칼과 방패를 서로 쨍쨍 소리 내며 부딪히는 행위로 하였다. 우리의 경우 소중화(少中華)라는 안도감이 조선시대의 역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행하였지만 게르만족의 역사에서 다른 사람에게 예속되지 않는다는 ‘자유’라는 개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고(至高)의 가치를 지녔다.
 
고대 게르만족의 법의 운용에서 재미있는 전통이 보인다. 게르만족은 로마의 성문법체제 대신에 관습법을 발전시켰고 로마의 경우처럼 권력자가 법을 제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던 관례를 찾아 법으로 사용하였다. 그런즉 로마의 법은 국가중심의 주권적 성격을 가진 반면, 게르만족의 법은 부족적, 관습중시의 전통적 성격을 가졌다. 게르만 족의 법정에서의 판결은 국법을 행사하는 판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판결 발견자들(Urteilfinder)이 있어서 과거의 판례를 찾고 배심원들이 유, 무죄를 결정하는 형식을 발전시켰다. 미국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써, 배심원을 설득하려는 검사와 변호사의 설전(舌戰)과 판사가 중립적 입장을 견제하며 재판을 진행시키는 장면이 생각나는데 이는 게르만의 재판형태에 뿌리를 둔 것이다.

부족시대 게르만족 A와 B 사이에 송사가 있는 경우 증인들은 재판에서 결정적 역할을 행하였다. 게르만족의 재판에서는 누구든 자기주장에 동조하는 증인들을 많이 모으면 무조건 이겼다. 그런즉 자기에게 유리한 증인들을 모으기 위하여 소송당사자들은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엉터리 증인을 구분하기 위하여 법정에서 증인에게 증인선서를 시켰는데 그 선서내용은 길고 복잡 하였고 증인은 이 선서내용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또 더듬거리지도 않고 암송해야 만 증인의 자격을 얻었다. 게르만족들은 증인후보가 선서내용을 더듬거나 암송하다가 틀리면 신이 거짓 증인을 구분하기 위하여 간섭한 것으로 믿었다.

또한 게르만족들은 재판에서 유, 무죄를 구분하는 방법으로 특이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혐의자를 물에 집어넣어 그가 떠오르면 유죄로 가라앉으면 무죄로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혐의자들은 떠오르지 않으려고 애쓰다 익사하기조차 하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이와 달리 떠오르면 무죄, 가라앉으면 유죄로 재판하였다. 얼핏 보아 어처구니없는 재판방식이지만 법의 여신의 모습이 두 눈을 감고,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 모습을 기억한다면 유, 무죄 판정방식이 완전히 상반된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혐의자들은 때로는 불에 달군 돌을 손으로 잡아야 하였다. 그로 인하여 화상을 입은 손에 며칠 뒤 염증이 생기면 유죄로 판단되었고 염증이 없으면 무죄였다. 혐의자들은 때로는 불에 달군 돌 위를 맨발로 걸어 다녀야 하였다. 화상을 입은 발에 염증이 생겼는지의 여부를 살피는 방법도 유, 무죄를 가르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A.D. 4세기 이전 여전히 로마에 비하여 야만적 수준에 머물러 있던 게르만족은 그럼에도 로마의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었다. 게르만족에 대한 로마인들의 좋은 평판의 내용은 게르만족이 용감하고 충성스럽고 성실, 근면하며 소박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점에 모아졌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독일 사람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좋은 인상을 모은 것과 비슷하게 보인다. 몰락 과정에 놓인 지중해 지역의 로마제국을 대신하여 서유럽에서 새로운 문화의 토대를 쌓아가던 사람들이 게르만족이었고 이들은 서양 중세의 역사를 주도할 주체였다.

 

 구학서 [세계사]

역사학자. 강릉원주대학교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세기 말 독일 사회사 사회계층’을 중점적으로 연구해왔으며 저서로는 《유럽사의 구조와 전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