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행복하십니까?
지금 행복하십니까?
노아 김태우 목사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당시였다. 연필을 칼로 깎아서 다닐 그 무렵 글을 공책에 쓰기 위해서는 책받침이 필수였다. 그 후에도 그랬지만 초등학생들이 좋아하는 책받침의 그림들이 다양했는데 내가 기금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는 책받침이 있다.
그 내용은 지옥의 모습이 그려진 것이었다. 혀가 뽑히고 팔달 리가 뽑혀 나가는 능지처참의 장면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한 것들이 어린 나에게는 죽음의 공포를 안겨다 주기에 충분하였지만 그래도 어린 나에게는 도덕성을 길러 준다거나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계기는 되지 않았다.
한날은 친구랑 놀다가 이런 대화를 하였다.
“넌 죽으면 천당에 가겠니? 아니면 지옥에 가겠니?”
참으로 결론이 없는 질문을 서로 대답을 하고는 서로 땅바닥에 귀를 대어 땅에서 울리는 메시지를 듣기로 하였다. 잠시 땅에 귀를 기울이다가 둘은 눈을 마주보며 서로의 메시지를 나누었다. 그 친구는 천국에 간다는 메시지를 들었고, 나는 지옥에 간다는 메시지를 들었다고 서로 엇갈린 대답을 하였다.
하지만 의심 없이 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것이 특별히 땅이 뭔가를 계시해 주었다기보다는 그 당시 서로의 자존감의 크기였을 것이다. 대체로 부유하였던 친구보다 난 항상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 넌 천국에 가겠니? 아니면 지옥에 가겠니?
지금 그렇게 질문한다면 우리는 한결같은 대답을 하게 될 것이다. 난 죄로 지옥 갈 사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천국에 갈 것이야.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옥은 고통스러운 곳이며 천국은 행복한 곳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현세에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영원의 세계에서는 고통이 아닌 행복한 곳에서 살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난 이 소망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관념적으로 생각할 때는 그것이 옳다고 여겨지지만 난 지금도 행복해지고 싶다. 그리고 죽어서 행복한 것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난 지금 행복해 지고 싶다.”
과연 나만 바라고 외치는 소리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에 질문을 바꾸어서 “너는 지금 행복해 지고 싶니? 아니면 지금은 불행하다 하더라도 죽어서 행복해진다면 참고 살겠니?”라고 질문을 해 보자. 어떤 대답이 많이 나올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지금 행복해 지고 싶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한 대답은 지금부터 영원까지 행복해 지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BC 400년경의 서양철학의 비조인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으로 5가지를 들었다. 생활하기에 조금 부족한 듯 한 재산,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자신의 자만에 비해 부족한 명예, 중간정도의 체력, 연설을 듣고서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라는 것이다.
그가 생각한 행복의 조건은 부족하고 채워지지 못한 겸허한 생을 말한다. 차고 넘치게 완벽한 상태에 있으면 바로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근심과 불안과 긴장이 교차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므로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나날의 삶 속에 행복이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무한한 욕망에 대한 자제의 필요성을 암시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철학자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나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에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완벽해야 행복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우리는 행복했었다.
우리가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했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전에 우리는 완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세상 속에서 살았다고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과 그가 살기에 완전한 환경인 에덴동산이다. 하지만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잃어버린 후 우리에게는 완전함이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 세상에서 완전함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족함 가운데 완전함 즉 이데아를 향해 노력하는 그 삶을 행복으로 보았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그 완전함이 곧 임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완전함을 기다리며 광야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그것이 자신이 살아야 하는 방식이며 행복(완성)을 기다리는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정한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였을 때에는 그의 오심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만족함을 주지 못하였다.
세례 요한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오실 그 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
처음에는 예수가 오실 그 분임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지만(마13:13-17), 예수의 삶의 방식이 세례 요한을 혼동에 빠지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신다.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요한과는 달리 예수님은 모든 일상생활에 참여하였다. 그 까닭에 원수들은 “먹기를 탐하는 자, 술꾼”으로 불렸으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놀림을 받았다.
예수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자신들에게 시험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원수)들이 그를 거부하는 이유가 되었다.
결국 플라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무엇인가 부족하기 때문에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행복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함을 우리 스스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불행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자들은 구원의 완성이며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다가왔을 때에 그를 맞이해야 하며 환영해야 한다. 하지만 더욱 더 불행한 것은 현재 그들과 함께 임하여 있는 천국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누리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비밀이 되어 버렸다. 감추어진 것이 된 것이다. 누가 어떻게 이것을 찾을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노력하였다. 아니 닮아야 되겠지만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를 신랑을 맞이해야 하며 받아들여야 하며 그의 말씀에 반응을 해야 하는 것 밖에 없다. 이것이 믿음이며 신앙이다.
세례 요한 조차도 의문 갖게 하였던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은 결국 그의 영이 그의 백성들 가운데 임하심으로 인하여 모든 지식이 완전해 지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을 본받게 하게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심을 알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모든 죄를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며 부활하신 것이다. 이것을 믿는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발을 디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비록 앞으로 우리에게 심판이 남아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이 지옥같은 삶이고 견디어 내어야 하는 삶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지금이 하나님 나라라고 고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함은 더 이상 우리를 행복에서 끌어내리는 도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연약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는 감언이설로 포장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부족한 나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항상 완성시키는 그와 동행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 행복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다.
더 이상 지옥의 메시지를 듣지 않아도 되는 평안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