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국의 자물쇠를 열다(마13:1-9) -
노아 김태우 목사
지금 예수님이 우리들을 향하여서 이 말씀을 한다면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요? 아마도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면서 자신은 어떤 유형의 밭일까? 하며 고민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스스로 좋은 밭이 아님을 시인하며 고민에 빠질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약속을 할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좋은 밭이 아니지만 앞으로 내가 애쓰고 힘써서 좋은 밭이 되면 되잖아 틀림없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소망을 가져 볼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설교자나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땅을 중심으로 이해를 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본문에서 씨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13:19-23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이 해석으로 봐서는 좋은 밭에서 많은 결실을 맺는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듣고는 좋은 밭이 되어서 많은 결실을 맺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제자들도 예수님이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 궁금하였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마13:11-16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즉, 비유는 천국에 관한 말씀인데 어떤 이에게는 천국이 허락되어 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천국이 감추어져 있어서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듣고 감추어진 것은 무엇이며 드러난 것은 무엇일까? 모두가 다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는가? 좋은 밭에 뿌려진 씨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까? 그런데 단순히 씨가 열매를 맺는 것이 결론이 아니라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다.
씨는 그 자체가 생명이어서 뿌려만 지면 싹을 내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문제는 밭이다. 세 종류의 밭은 결코 순순히 씨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밭을 어떻게 기경가고 가꾸어 좋은 밭이 되게 할 것인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스스로 갈고 닦아서 돌과 가시떨기를 제거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는 스스로 수양을 잘하여서 몸과 마음이 준비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곳이 된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경건한 삶을 살기를 원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 포로로서의 삶을 살게 된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서 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을 삶의 양식으로 삼아 사는 자들이 바리새파였다.
또한 사두개파는 내세를 믿지 않고 정치적이며 세속적인 귀족을 위한 정치집단이었다. 이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귀족으로서 정치권력을 잡고 나라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에세네파는 신비적 금욕주의를 자양하며 하나님과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정결함을 위해 세속과 단절하고 은둔 생활을 하므로 금욕주의를 실천하였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을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바로잡는 것을 모토로 하는 정치신학으로 투쟁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내세적인 것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이며 숨겨져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내면적인 것을 강조하여 세속과 단절하고 방어적이며 도피적 생활을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의 모토들은 환경의 변화에 의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희석이 된다. 씨는 말씀(막4:14)이다. 밭은 마태와 누가는 마음으로 표현하고 있다(마13:19;눅8:12). 그러므로 말씀이 마음에 뿌려졌는데 그 마음은 세상의 변화와 환경에 의해 결실을 맺지 못한다. 하지만 좋은 밭에 뿌려진 씨는 그 손해를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의 결실을 맺게 되는데 이와 같은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밭의 환경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결실을 맺지 못하는 밭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좋은 밭에 의해 풍성하게 이루어져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비유는 밭에 의존하지 않고 씨 뿌리는 자를 말씀하고 있다.
마13:24에서 천국은 씨 부리는 자와 같다고 하였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고 난 후 토양과 날씨에 의존하여 기다리는 모습이라면 그 모습이 얼마나 무력한가? 그 씨 또한 환경에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는 연약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연약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인을 비롯하여 지금 우리의 모습에서도 이런 나라는 용납하기 힘들 것입니다.
기독당을 만들어서라도 정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든지, 아니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우리 스스로 수양하여 마음의 천국을 이루든지, 그것도 아니면 무상한 이 세상 속에서 참고 견디다가 나중에 강력하게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에 관한 이 비유는 공격적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온전한 개념을 가르치시는데 그 말씀은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13:17).”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제자들은 현재 보고 듣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보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이시며 그의 말씀은 천국의 비유였다. 이 말씀을 듣는 당시 그의 제자들조차도 이 말씀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알기 힘들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막4:13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제자들이 이 말씀을 온전히 깨닫게 된 것은 오순절날 성령이 임재하고 난 이후이다. 그 때에 이르러서 지식으로 알고 있던 것을 온전히 믿게 되었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씨는 예수님이다. 그 씨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뿌려졌다. 하지만 그 세상의 마음은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그 씨가 결실을 맺지 못하도록 하였다. 세상은 각 자의 사정과 변명에 의해 저주의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패배하도록 만들었다. 결코 그 씨를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할 밭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씨는 사망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으로 일어났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씨를 뿌리는 자는 씨가 싹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하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는 ‘씨’의 비유가 아니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인간의 노역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코 밭이 스스로를 기경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 그 밭은 길 가이고, 돌밭이며 가시덤불이 가득한 밭이었다. 소망이 없는 밭이었다. 하지만 성령의 임재하심은 그런 밭을 기경하여 좋은 밭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실제로 탈무드와 외경에서는 당시 팔레스타인의 농경법에서 먼저 씨를 뿌리고 경작을 하는 방식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장애물로 가득한 밭에 씨를 뿌린 후에 농부가 기경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해야 밭이 일구어지고 열매를 맺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밭은 결코 존재하지 않거나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그리고 에세네파가 좋은 밭이어야 한다.
밭은 지극히 수동적이다. 씨를 품고 있는 것, 아니 씨가 뿌려졌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도 믿음이라고 인정한다. 믿음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씨가 내 안에 뿌려지고 내 안에 뿌린 하나님이 흙을 덮어주어 그 속에서 씨가 꿈틀 거릴 때 그 꿈틀거림을 느끼면서 아 내 안에 씨가 자라는구나 하고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였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씨가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다. 천국의 모습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한 바와 같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변혁을 통해 찾아오는 것이 아니요, 우리의 마음을 수양할 때 느끼는 그 평안함도 아니요, 죽어서 가는 황홀한 그런 곳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 가운데서 싹을 내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가 내안에 내가 그의 안에 있는 것을 믿음으로 느끼면 된다. 아니 믿음이라는 단어가 너무 힘들거든 그냥 느끼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니 이미 임한 것을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성령이 임하여 좋은 밭이 된 사도들을 통하여 땅 끝까지 전하게 하였고, 그것이 자라나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임하여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맺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그 능력이 그의 재림에까지 이어져 더 풍성한 열매들을 맺어갈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있고 보고 있는 것이다.
추수 때가 되면 선한 농부이시며 씨를 뿌리신 자가 그 결실을 추수할 것이며 그 날은 성도에게는 영생으로 가라지는 심판으로 이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 비유의 비밀의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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