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왕이다.”
이 한 문장은 참인가 거짓인가?
이 질문에 여러 가지 답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올바른 이해를 하고 있는 답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 같아 좀 더 첨가하여 설명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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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세상을 다스리게 하심에 있다.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우주적인 통치자는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 분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왕에게만 있는 다스림의 권위를 위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위의 말씀을 ‘위임명령’이라고도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눈에 보이는 신(왕)이 없음에 불안해하였습니다. 그들이 400년 동안 애굽에 있으면서 경험한 것은 신이며 왕인 바로의 통치였습니다. 이것을 ‘재정일치’라고 합니다. 이 재정일치의 정치는 왕의 권한을 막강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사울이 이 재정일치의 정치를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오기 전에 자신이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불안해하던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없는 틈을 타서 자신들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의 형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불뱀이 그들을 물어 죽게합니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을 일러줍니다. 그 중 제2계명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설명해 줍니다. 그 형상은 모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 자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형상으로 인하여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 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이 당시 이스라엘에게 이해가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살아간 삶의 형태를 보면 절대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조차도 이해 불가입니다. 그 이유는 죄의 결과 때문입니다.
최초의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불순종이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이 ‘다스리라’는 명령을,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왜곡하여 이해하도록 뱀이 유혹한 것입니다.
‘위임명령’에서 ‘다스림’은 인간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다스림에 대해서는 하와를 창조함에서 나타납니다. 하와는 ‘돕는 배필’이며, 함께 다스릴 동역자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바로가 애굽을 다스림과 같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돕는 평등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세상은 서로가 평등하며 사랑으로 돕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가나안을 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세상에서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통치의 유일한 왕은 한분 하나님 밖에 없음을 그들은 학습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하였을 때에 사무엘은 왕정으로 오는 폐해를 언급한 이유도 그렇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왕정정치에 돌입하게 되지만 왕으로 세움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인간 왕들은 실패하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림마저도 부정하여 우상을 섬기는 나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같이 지배와 피지배로 점철된 왕권정치를 추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강대국의 속국이 되는 포로생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인간이 쓰는 단어인 ‘다스림’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강한 힘으로 컨트롤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진정한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통치의 완성이십니다. 그는 세상의 다스림이 무엇인지 손수 보여 주심으로 그 단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비유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림은 하늘의 나는 새를 보고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마6:26). 하나님의 다스림은 새에게 모이를 주는 주인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키우고 성장시키는 다스림입니다. 그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십니다. 그가 죽으심은 모든 백성이 죄로 말미암아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 있지 못하거나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 되어 있는 것을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베드로전서 기자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들은 왕같은 제사장이이며 거룩한 나라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왕같은 제사장은 사울왕이 원했고 바로가 추구했던 재정일치의 정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정확한 표현은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가는 대리인이 되었듯이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와 함께 왕노릇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의 완성은 성도의 부활로서 이루어지는데 계시록 20장 6절에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더 이상 차별이 없고 소외당하는 자들이 없는 평등한 세상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왕권과 인간의 다스림은 하나님과의 소통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소통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왕, 제사장, 선지자직의 완성이십니다. 그 안에 있는 성도들 또한 이 직분을 함께 공유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도를 ‘왕’이라고 일컫는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자로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는 평등함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자이며, 서로 사랑으로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돕는 자가 되도록 사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잘 자랄 수 있도록 돌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사탄이 뿌리고 간 가라지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록 그들로 인하여 저항을 받는다 할지라도 성도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왕으로서 세상을 이기고 또 이겨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왕의 직분을 온전히 이해하고 행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이며 성도로서 살아가는 지혜이며 의무입니다.
여러분은 왕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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