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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주일설교

배 터지는 교회와 찢어지게 가난한 교회

 

과거 우리 나라에도 경제적인 빈곤의 시기가 있었다. ‘보릿고개’는 보리를 수확하기까지 먹을 것이 없는 시기를 말하는데 그 때 사람들은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다. 이로 인하여 생긴 병이 변비인데,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하다.’는 말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 때의 일이므로  50대 중반의 우리 또래에게는 그리 깊은 현실감이 있지는 않다. 우리 시대는 비록 가난하기는 했어도 굶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게 가난한 시절에도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 있는데  '아이는 배 터져 죽고, 어른들은 배고파 죽는다'는 말이다.

오랜 굶주림 끝에 얼마간 양식이 생기면 어른들은 배고픈 자식들을 위해 자신이 먹을 양을 자제하고 아이들에게 많이 먹도록 한 부모의 사랑에서 나온 말이다.

오늘날 초대형교회들의 세습을 보면서 대형교회의 세대교체를 염려하는 말들이 오고가는 가운데 대형교회는 배 터져 죽고, 개척교회는 배고파 죽는 실정이 되었다. 이것은 보릿고개에서 경험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자비와 사랑의 흔적은 눈꼽만큼도 없다. 오히려 욕심과 기득권의 횡포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오늘날 부흥이라는 이름하에 교회가 성장하게 된 것에는 ‘번영신학’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샤머니즘과 번영신학의 조합은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교회들의 부동산을 늘여 나가는 근간이 되었다. 

이러한 잔재는 아직도 나아 있어 십일조하는 것이 가정경제를 일을켜 세우는 원인이 된다고 강요하고, 율법을 내세워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하여 교회에 무급봉사하는 것이 신앙의 수준으로 측량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이와같이 봉사와 헌금강요로 교회는 부동산을 사들였고, 그 부동산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아 이것을 ‘부흥’이라는 단어 속에 면죄부를 요구하였다. 

그렇다고 개척교회는 깨끗하고 대형교회는 부패하였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이 모든 현상은 물질만능주의가 낳은 작금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대형교회는 교회를 증축하기 위하여 성도들을 몰아 세우고, 개척교회는 속히 자립하기 위하여 성도들을 몰아 세운다. 교회에서 복음은 변질되고 변질된 복음을 내세워 결국에는 이익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형태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좋아하는 단어가 '부흥'이라고 한다. 누가 어떤 프로그램과 방법으로 교회를 부흥시켰다 하여 세미나를 개최하면 전국에 있는 목회자들이 빚을 내어서라도 세미나비를 지불하면서 배우러 모여든다. 여기에는 개척교회고 자립교회고 구분이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진리는 사라지고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만 것이다. 이것이 말세의 징조이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시지 한자리에서 바벨탑을 쌓는 그런 부흥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런 부흥을 원하는 것은 인간일 뿐이다.

진리는 진리 그 자체가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진정 오늘날 교회들이 그렇게 원하는 부흥을 원하셨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도 없었다. 

하나님의 목표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들의 죄를 하나님께서 사하시고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시는 일이다. 그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넘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며, 순결한 신부와 신랑과의 관계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교회이다.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으며, 죄인들의 죄를 대신하여 저주받은 십자가에 희생을 당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진정한 부흥이다.’ 

복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이제 그 사랑에 빚진자가 된다. 그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복음의 ‘증인’의 일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십일조를 하여 가정이 잘 살게 되고, 봉사를 하여 가족들의 미래가 보장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냥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던 우리의 과거는 헌금 잘하고 봉사 잘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최고봉인 줄 알고 그렇게 거짓말에 속아 교회에 헌신하였다.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복음 가운데 사는 자들이 사랑과 희생으로 약한 자를 돕는 빛과 소금의 삶을 가르치지 않았다. 진정한 믿음으로 복음 가운데 사는 성도들은 예수님과 같이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희생이야 말로 진정한 진리의 실천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듯이 말로만 진리를 외치고 속으로는 세상을 사랑하는 교회지도자들은 말세의 거짓선지자들이다. 이것은 대형교회와 개척교회를 가리는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책임을 목회자에게 돌리며 교회는 목회자들이 바로 서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는 일리가 있겠지만 그 명제가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을 온전히 받아 성도가 된 자들은 분별을 하여야 하나, 이미 거짓복음에 길들여진 성도들도 맘몬의 노예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므로 교회에 성도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그 가운데 참된 복음의 진리 안에서 사는 자들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바울이 대형교회를 만들지 않았다. 베드로가 대형교회를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원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최후는 순교였다.

지금 우리의 시대는 신앙의 보릿고개의 시대이다. 교회가 없는 것도 아니요. 대형교회가 즐비하지만 진리가, 복음이 살아 있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형교회는 배 불러 권력싸움에 혈안이 되어 배터져 죽어가고 있고, 개척교회는 대형교회를 향한 욕망으로 혈안이 되어 있다. 똥구멍 찍어져 죽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다시 그를 십자가에 내 몰아야 할 판이다. 하지만 그는 다시 못 박히러 오지 않는다. 다만 그의 재림은 ‘심판’을 위한 것이다.

오늘도 진리 가운데 서 있지 못하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참된 지리를 찾아서 헤매이는 성도들을 누가 안아 줄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인가? 참된 진리 안에 서 있는 성도라면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마땅하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본분이기 때문이다.

떡 한조각이 남아 있어 감사하는 성도가 얼마나 있겠는가?

12광주리가 남아 있어 감사하는 성도가 얼마나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떡을 보면서 방황하는 자가 아니라 그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며 그 안에서 참된 자유함을 누리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세대교체는 어떤 정치적이며 법적인 해법을 찾을 수 없다. 

세대교체는 온전한 복음이 전해질 때 이루어 지는 것이다.

교회에 구원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또한 마지막 날의 심판자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복음은 물질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 관계가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신부는 그 은혜 안에서 감동하여 세상에 사랑과 희생의 마음으로 나아가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스스로 속아 큰 집을 짓고 그 가운데서 서로 부흥이라는 명목하에 서로 속이고 기득권을 위해 이전투구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사탄의 회’일 뿐이다. 

거짓 선지자들과 사탄의 회의 최후는 영벌의 심판임을 교회는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