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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주일설교

아브라함의 복/갈3:12-13

아브라함의 복(3:12-14)

  김 노 아 목사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치술신모가 되었다는 박제상의 아내에 대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초기 내물왕 즉위 36년에 일본의 볼모로 셋째 미해 왕자를 보내었으며, 내물왕의 아들 눌지왕이 즉위하였을 때에는 고구려가 화친을 목적으로 王弟를 요구하자 보해 왕자를 보내게 되었다. 졸지에 아우 둘을 잃고 근심에 빠진 눌지왕은 충신 박제상에게 두 아우를 구해 오도록 명하였다. 박제상은 고구려에 몰래 잠입하여 보해 왕자를 구출하여 왔고 곧 이어 집에도 들르지 않고 미해 왕자를 구해오기 위하여 일본으로 향하여 갔다. 그 소식을 듣고 아내가 바다로 달려 나갔으나 박제상은 이미 떠난 이후였다. 박제상은 자신이 신라를 탈출하여 왔다고 속이고 고기와 새를 잡아 일본 왕에게 바침으로 신임을 얻게 되었고 새벽 안개가 짙게 끼인 새벽에 미해 왕자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붙잡히게 된다. 그 후 발바닥의 껍질이 벗겨지 갈대 밭과 달구어진 철판 위를 걷는 고문을 받기도 하고 일본의 신하가 되도록 회유를 받게 되는데 박재상은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 않겠으며, 차라리 계림의 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이나 녹을 먹지 않겠다고 말한 후 불에 타 죽게 된다.

한편 일본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박제상의 부인과 세 딸은 치술령에 올라가 남편과 아버지를 기다리다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구전에 의하면 아내는 ’, 세 딸은 이라는 새가 되었다고도 한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간절히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습니까?

떠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박제상의 부인과 같이 우리도 남편의 사업이 번창하여 금이환양하기를 기다리고, 우리의 자녀들은 立身揚名 하여 출세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소원은 우리 누구나 갖는 한결 같은 바램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소망이 죽어서 망부석이 될 만큼 간절한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행복의 염원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인간의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 난 이후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우리의 가족을 위한 것이고 우리의 사랑과 행복을 위한 것들입니다.

기도원에 올라가 보면 수많은 병자들이 자신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있고 입시 때가 되면 자녀의 합격을 위해 수많은 부모들이 밤을 새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성령이 우리를 위해 해 주어야 하는 것은 병이 나을 수 있는 신유와 자녀가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강력하게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면 성령이 할 일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실 때에 언약을 하십니다. 그 언약의 내용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땅, , 복에 관한 언약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당대의 아브라함 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성취는 본래 이방인이었던 우리들에게도 유효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서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서 언약하신 땅은 부동산으로 씨는 자녀들의 출세로 복은 온 가문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관은 정의하자면 이 땅에서 예수 믿고 무병장수하며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서도 천국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복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의 하자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 가운데 우리가 임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복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것입니다.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우리 소유의 부동산을 주겠다는 의미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인 뜻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속해 있는 땅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115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땅을 본향으로 생각하였다면 그들에게는 돌아갈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바랬던 땅의 참된 의미는 16절에 기록된 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씨에 관하여는 우리 자녀들의 출세를 이야기 하고 있지 않다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는 단순한 출세에 있는 것이 아니며 혈통적인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태복음 39절에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하시며 유대적인 혈통관계를 부정하셨으며 갈라디아서 36,7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고 정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씨가 된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은혜 가운데서 이방인 되었던 우리들을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 속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가 저주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하신 그 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이며 우리가 믿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것을 설명해 주어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믿을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을려니 차라리 망부석이 되고 말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다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사야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6:9)”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장님이 되고 귀머거리가 된 데에서 치유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듣고 깨달아야 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에 하신 일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타락한 우리의 본성과 욕심은 그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주실 것을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셨고(2:28), 예수님께서도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14:16). 그 보혜사 성령은 우리가 그 동안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였던 눈과 귀를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보혜사가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실 때에 우리가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예수가 우리를 죄에서 건질 그리스도인 것과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인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들이 간절히 원하여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서 행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복음이 허락된 것은 오늘 말씀 갈라디아서 214절에 기록된 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함과 같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19:2)”고 사도 바울이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한다면 너희가 받은 그 성령의 능력은 무엇이냐?”라고 사도 바울은 다시 질문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고 난 후에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성령이 동의하여 주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의 권능이 나타나기는커녕 오히려 성령을 근심하게만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에서는 성령의 임재하심과 그의 능력의 나타나심에 대해서 가르칠 것이며 그 능력이 드러나는데에 합심할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하며 그것이 내 안에서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땅과 씨와 복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종용하고 있을 때 우리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누리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어서 가는 추상적인 나라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작정 기다리는 망부석이 아니라 성령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