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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

한 밤중에 찾아 온 친구 비유

한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눅11:5-8

 


통상적으로 우리는 이 비유를 해석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 팔레스타인의 관습이나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입장에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풍습을 알고 이 비유의 말씀을 들으면 그 의미가 상당히 달라집니다.

우선 우리가 본문을 읽고 순간 이해 되는대로 해석한 영국의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늦은 밤이었다. 허기진 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친구의 집에 예고없이 들이닥치게 되었다. 부스러기 빵조각도 없는 이 집의 주인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웃집에 달려가 빵 세덩이를 꾸어 달라고 하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이 정도면 한 사람 먹기에 족한 양이었다.

방 하나에 온 식구가 자고 있는 이웃집에 이르렀다. 아이들도 이부자리를 깔고 나란히 드러누웠으며 부모는 양쪽 가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때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집에 가장되는 아버지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과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향해 말한다. “제발 귀찮게 굴지 마시오. 대문 닫은 지가 벌써 오래되었고. 만일 내가 일어난다면 우리 집 식구들 전체가 깨게 될 것이오. 그러니 그냥 가시오. 나는 일어날 수 없소이다. 그러나 문 바깥 어두움 속에 서 있는 우리의 주인공은 안되오 하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문을 두드렸다. 마지못해 집 주인이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그렇게 했다. 마침내 집주인이 문빗장을 열고 나와 빵 세덩이를 건네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통상적인 해석의 심각한 결점은 당시 문화적인 풍속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친구를 위해 떡을 빌리러 간 주인을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서구적인 문화의 방식처럼 개인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유의 열쇠가 되는 중심 단어를 부끄러움을 모름이 아닌 간청함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자 그럼 차근차근 살펴보자.

 

너희 중에 누가?”로 시작하는 예수님의 물음에는 두 가지의 답변이 기대됩니다. “아무도 그렇지 않습니다든지 아니면 누구든지 그러합니다.”라는 대답이다. 즉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누구든지 동일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비유에서 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한밤중에 찾아가서 요청하기를 여보게, 나에게 빵 세덩이만 빌려 주게나. 내 친구 중의 하나가 먼 길에서 나를 찾아왔는데 그를 위해 대접할 것이 없어서 이렇게 자네에게 부탁하네.’ 그런데 집 안에서 소리가 들려오기를 성가시게 하지 말게나 대문 빗장도 질렀고 우리 아이들도 잠자리에 누웠으니 일어 날 수 없다네라고 했다고 하자. 너희들은 이러한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당연한 대답은 무엇인가?

 

우리가 함정에 빠지는 것은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당시로 들어가지 못하고 현재 우리의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물론 우리는 24시 편의점이나 식당을 통해서 해결하면 된다고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환경에 살지만 그런 편의시설이 없는 곳이라고 가정할 때 문을 열어 주지 않거나 모른 척하여도 괜찮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빵을 주어야 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질문은 당연한 대답이 나오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상되는 대답은 아니오!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이다.

 

간청을 거절할 수 없다는 대답이다. 우리는 같은 동양인으로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 우리나라는 체면문화이다. 속담에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양반들은 체면 때문에 배가 고파도 남에게 꾸거나 농사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비꼬는 속담이다. 하지만 양반이 체면 불구하고 빌어먹거나 주워 먹는다면 그는 한 마을의 공동체에서 창피를 당할 것이 뻔하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이 문화의 뿌리는 아직 남아있다. 아무리 개인주의가 팽배한 사회로 변모하고 있지만 우리 동양의 사고 속에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문화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다. 친구를 찾아온 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한사람이다. 물론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을 청하는 시간에 남의 집에 찾아가는 것도 예의에 맞지 않는 일이지만 지금 손님이 찾아 온 불가피한 사정에 두 사람이 놓여 있다. 한 사람은 자고 있고 한 사람은 손님이 찾아와 빵을 구하고 있다. 여기에서 거절했다면 공동체인 마을 사람들은 빵을 꿔 주지 않은 사람을 예절과 규범을 어긴 사람으로 여기고 손가락질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모두 공감하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아니오, 그럴 수 없습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제 그 내용을 살피면, 주인은 왜 빵 세덩이를 요구할까요?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자르지 않은 빵 한덩이를 대접하는 관례라고 합니다. 하지만 세덩이를 요구한 것은 풍성하게 대접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빵을 공동으로 굽고 나누기 때문에 누구네 집에 빵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손님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주인의 집에도 빵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을 것이지만 예의상 먹다 남은 빵으로 대접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먹을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반응을 표현하기를 너희 중에 한 사람이 이웃에게 가서 자기에게 찾아온 친구를 위하여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그 이웃이 그 소리를 듣고 변명하기를, ‘미안합니다. 대문을 걸어 잠근 지도 오래됐고 우리 애들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너희들이 상상이나 하겠는가?”라는 말입니다. 그 때 청중들은 비웃으며, “말도 안되는 소립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주인을 찾아온 손님은 한 개인의 손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동네 사람들의 눈에는 동네 전체의 손님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손님을 맞을 수 있도록 큰 집에는 사랑방이 존재하였습니다.

 

이 비유의 의미의 핵심 단어는 8간청함입니다. 헬라어로는 아나데이아인데 이것을 번역할 때, 대담함, 졸라댐, 부끄러움을 모름, 끈덕짐으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빵을 구하러 온 주인이 뻔뻔스럽다고 생각하거나 끈질기게 간청을 했다고 대부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주인이 아니라 이웃집 사람에게 해당합니다.

다시 말하면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다는 핑계로 그에게 빵을 빌려 주지 않으면, 그 소문이 온 동네에 퍼질 것이고, 그 때문에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을 걱정하여 일어나 그에게 소용되는 대로 주었다는 것입니다.

 

수치와 부끄러움과 체면은 동양 문화권에서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바로 이 무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 이웃은 일어나 친구에게 필요한 것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 비유 또한 하나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권적 통치의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이 빵을 구하러간 이웃주민은 당연히 빵을 줄 것입니다. 그것은 그 이웃은 부끄러움도 없이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을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규약에 따라 사는 사람이며, 또한 그렇게 살기 때문에 그는 신뢰할 만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도 이와 같이 신뢰할 만한 분이십니다. 그는 언약의 규약에 반대되게 행동하시지 않습니다. 그는 그의 약속들에 대해 성실하시며 신실하십니다. 그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귀찮은 상황 속에 있다 하더라도 마을의 규범 때문에 한 밤중에 일어나 빵을 주는 이웃을 여러분이 이해하신다면 사람도 그러할진대, 우리 하나님은 자신이 언약하신 것을 소홀히 여겨 행하지 않을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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