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삶 -
노아 김 태우 목사
경기가 안 좋은 지금 주변의 가게들이 1년, 2년을 못 버티고 새로운 업종으로 변경이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인테리어가 바뀝니다. 그것을 보면서 “참, 낭비다.”라고 생각하지만 업주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대중들의 시각에 맞게 환경을 만들어야 장사도 그만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음식은 맛으로 승부하고 공부는 실력으로 나타낸다고 말하면 옳은 말이지만 브랜드가 작용하는 힘은 이미 마케팅 분야에서는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그 인식이 고착화 되면 고정관념이 됩니다. 그리고 그 고정관념이 신앙에서 벗어나게 되면 우상화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이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고정관념이 되어 버린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고 잘못된 고정관념이 있어 복음을 왜곡하거나 저해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어느 날 제가 교인들에게 돌발 질문을 하였습니다. 성경에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는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누가 여기에 해당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즉각적인 대답은 “목사님이요.”였습니다. 이런 대답이 나오는 것은 성경의 의미보다는 상식적으로 그럴 것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그 외에도 예배당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른다든지 강대상 주변을 신성시 하는 것들은 우리 종교의식 속에 심어져 있는 것들을 신앙화하여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가르쳐도 우리의 생활 속에서 형성된 관념들을 깨어 버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새들이 태어날 때 처음 본 것을 자기 엄마로 인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성도를 향하여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을 때, 우리는 최소한 제사장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제사장 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주어질 때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단순하게 설명하면 백성들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곳은 성전이며 정해진 의식에 따라 제사를 드립니다. 그렇다면 왜 제사장이 성전에서 의식에 따라 제사를 드릴까요?
오늘 우리에게 질문을 한다면 금방 대답을 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죄를 사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릴 때에 자신을 위해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린 후에 백성들을 위해서도 속죄제와 번제를 드립니다. 속죄제는 죄 사함을 위함이요, 번제는 헌신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들을 축복하는 순서입니다.
이 순서의 의미는 왕이신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가 친밀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본질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친밀함의 목적보다는 죄 사함의 절차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기독교인들은 일주일 내내 죄를 짓고 하루 교회에서 용서를 받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선지자 이사야가 질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1:11-14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그렇다면 제사에서 죄 사함의 효능이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레4:35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떼어 낸 것 같이 떼어 내어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사의 의식이 아니라 제가가 의미하는 본질이었습니다. 그 본질이 희석이 되는 제사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히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제사는 하나님이 백성을 사랑하신 것과 그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신앙이 근본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모든 사람들이 제사의 의미를 몰랐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들 가운데서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중 선지자 이사야가 경험한 것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6:1-7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그리고 때가 이르면 이스라엘의 종이 그 백성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 제물로 올 것을 알았습니다(사52:13-53:12).
스가랴 선지자 다른 질서의 제사 행위를 보았습니다.
슥3:1-10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증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시리라(슥3:9)’고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제사를 드림으로 죄 사람의 경험을 하였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 질 것을 경험하고 또한 온전히 이루어 질 것을 소망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고정관념에 묶여 제사를 죄 사함의 방도로 국한 시키고 그들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제사장과 제사 그리고 성전과 의식을 통해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징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로 집중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언약의 실체이며 완성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사장과 제사와 성전이 의미했듯이 그의 삶과 죽음과 통치는 제사의식이 주었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시며, 자신을 온전히 드림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어 백성들에게 복이 되신 것입니다.
이제 그가 백성들에게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일컫는 것은 성전에서 제사장이 되어 의식대로 제사를 지내라는 의미가 아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화목케 하심을 기뻐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친밀히 가짐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이 놀라운 복음을 두고 우리는 부족함을 느끼는 듯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랫동안 제사 의식에 길들여진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도 제사를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전체는 제사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10:11-14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현대에서도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일천번제, 조상의 죄를 사하기 위한 번제, 성만찬, 목회자의 기도나 안수 그리고 다양한 감정을 자극하는 잡다한 것들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구원을 믿지 않는 결과이다.
유대교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외에도 율법을 지킬 때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고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갈3:10-14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지만 우리는 신앙의 진실성을 아직 율법으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았느냐고는 묻지 않지만 십일조를 하고 있느냐, 음식법의 잣대로 음주와 흡연을 하느냐로 말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계명인 사랑을 베풀지 않는 이유로 율법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 뿐 아니라, 우리는 신령하다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 말을 신앙의 성숙도와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며 병을 고치는 등 각종 은사를 행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일컫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의 성숙은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골2:18-20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르지 않고 산업화의 정신을 따라 왔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큰 것, 성장, 힘과 부, 성공을 신앙에도 적용하여 큰 교회, 큰 교단, 독재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지도자, 화려한 학력, 경력을 우대하고, 강제적인 전도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가난과 병약함 그리고 사업에 실패하거나 정신적으로 혼란하거나 사교성이 떨어지는 사람은 신앙적으로 무능하거나 신령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느껴 차별합니다. 인과응보의 사상을 첨가하여 사회적 연약함을 신앙의 부족함의 결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어떤 고정관념이 자리를 잡고 있어 우리의 신앙을 왜곡되게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근거로 하여 우리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이나 의식에 메이지 않으며 복음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안전이나 번영을 위해 살지 않으며 모든 일에 이웃을 위해 사랑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연약함을 고백하며, 자신의 실패와 역경과 아픔을 제거 해 줄 해답을 찾기 위해 안달하지 않습니다. 오직 어떤 처지에 있던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하며 하나님과의 풍성한 관계를 추구하며 사는 자들이 모든 시대의 하나님 백성이며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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