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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주일설교

풍랑아 잔잔하라/마8:23-27

[동영상설교]

 

풍랑을 잔잔케 하심

 

노아 김태우

 

1. 부르심

 

예수님의 공생애는 제자들을 부르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천지창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부르심을 통하여 시작됩니다.

이 사실은 신앙이란 초자연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인간의 삶과 동떨어지지 않는 현재적이며 현실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의 사역이 시작될 때 산상수훈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삶에 대한 새언약을 주어 율법을 완전케 하였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그의 가르침에 어떤 놀라운 소망을 발견하였는지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자신이 처하여 있는 어려운 삶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이라면 자신의 불행을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멀리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요구대로 나병환자와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엄밀치 따지자면 사람들이 믿고 따랐던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불행하게 만든 것들을 제거하기 위한 도움을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소외되고 차별당하며 살았던 그들에게 그 차별의 요소가 제거된다면 그들은 사회의 일원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소박한 소망이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소망이 아니라 절망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8:20).”

 

2. 부름을 받았던 사람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업을 버리고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짐작하건데 그들의 생업보다 더 큰 이익이나 보람을 기대했다는 것뿐입니다. 그 근거가 되는 기록은 변화산에서의 사건입니다.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17:3-4).”

예수님을 통하여 현실적인 가능성을 보았던 제자들은 즉각적으로 현실적인 삶이되기를 원합니다.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10:37).”

반면에 군중으로 묘사되는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고침을 받기 위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질병을 치유하였습니다.

 

 

3. 갈등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사람들이 그를 따랐던 이유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비정상적인 삶에서의 회복이었고, 그들의 지위의 상승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죄로 기인된 것이라고 단죄할 수 있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일반적인 인간 사회의 욕구였습니다. 다만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가 아는 대로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지배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럴 수 없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10:42-44).”

이 비논리적인 가르침은 의문을 낳게는 하였어도 듣는 이로 하여금 설득을 하기에는 현실적이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권력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그의 지배는 섬기는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4. 설득

예수님의 설들의 방법은 그의 삶 자체였으며 그것은 가르침과 고치심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절정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의 하신 예수님의 사역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와 같은 일을 한 목적은 죄에 속박 당하고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예수님이 하신 이 모든 사역은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들이 따라야 할 표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4,35).”

하지만 그 제자됨의 증거는 스스로의 깨달음이나 자기성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10:38,39)”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고 난 후에야 그들의 가치관은 온전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이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비밀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설득의 한 방법을 봅니다.

 

5. 풍랑을 잔잔케 하심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니, 제자들이 그를 따라갔다. 그런데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물결에 막 뒤덮일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

셨다. 제자들이 다가가서 예수를 깨우고서 말하였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하고 말씀하시고 나서,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새번역 마8:23-26).’

이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의 반응은 그가 누구인가?’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하였던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후에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점은 증폭되었습니다.

그리고 1세기 당시에 이 성경을 읽고 있는 사람들 또한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의 질병은 고치는 것은 물론이고 자연환경까지 바꾸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얼마나 놀라운 능력인가?

그런데 그 분이 지금 우리 곁에는 없습니다.

 

6. 현실과 신앙

지금 우리는 여전히 질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자연재해 속에서 그것을 이길 힘이 없다. 그런데 일부 신앙인들은 믿음을 가지면 이 모든 것을 극복해 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환경은 변하지 않으니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한다. 이 신앙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인내하며 이겨낼 수 있도록 정신적인 힘이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신앙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도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이 사건을 읽고 이렇게 생각하거나 말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여, 그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는 병자들을 고치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와 영으로 함께 하시니 믿음으로 나아가십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풍랑이 일고 있는 배 가운데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더욱 편히 주무시도록 하고 제자들은 그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평안히 맞이하도록 묵상하는 것 묵상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은 두 가지의 결과를 낳습니다.

예수님을 깨우든지 아니면 스스로 풍랑을 잔잔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관념 속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분을 관념적으로 믿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는 우리가 꿈꾸는 그 어떤 천국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7. 참된 신앙

신앙의 과정은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의 답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찾을 수 있지만 이 지식의 관문을 여는 것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의 반열에 선 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성도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를 얻은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거듭난 것과 거듭남의 주체이신 참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어디에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된다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예배의 삶, 성도의 삶은 무엇입니까? 관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바꾸는 실존적인 신앙이어야 합니다. 죽어서 천국가기 전에 적어도 내가 지금 해야 할 것은 병자들을 고치고 풍랑을 잔잔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받은 고난을 받으며 그가 받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를 성도로 제자로 부르신 목적입니다. 8. 나는 누구인가?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을 보고 그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 제자들이 오순절 이후에는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할 존재인가? 하는 주체성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14:12).”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은 말로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랑을 보여주신 것과 같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증인의 삶입니다. 천국은 육체적인 죽음으로 우리의 영혼이 가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에서 시작하여 영원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삶 그 자체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