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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주일설교

심은대로 거둔다는 참된 의미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 그 의미를 알아봅니다.



“심은대로 거둔다.”
아무런 생각없이 이 문장을 보고 있노라면, 이와 비슷한 명제들이 생각납니다. ‘콩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와 같은 말입니다.
이 말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정의하며 해석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나서 찾아 보았습니다.
역시 그렇게 어렵지 않은 문장이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해석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지금은 은퇴한 Y교회 C목사는 ‘하나님에게 십일조와 헌금으로 심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ㄱㅂㅅ 목사는 이 말씀의 대상이 예수를 믿은 성도들이라고 하면서 성도들이 어떻게 성공적인 삶을 살 것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에서는 육체를 위한다는 것은 세상의 헛된 일을 의미하고 성령을 위한다는 것은 성령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능력을 봉사와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하였던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육체를 위해 심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보지 않고 성경 (갈라디아서)본문이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제목 그대로 갈라디아서이니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라고 하니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기 보다는 교회에 다니고 있는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에 대한 판단은 인간이 최종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하여서 두 부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 두부류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 자신과 베드로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도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이며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라고 명시합니다.
이렇게 두부류로 나누는 것은 바울이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본문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가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은 복음의 순수성이 왜곡 되었기 때문이기에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순수성은 무엇이며 왜곡은 무엇입니까?
그 중심에 문제로 드러난 것이 할례와 율법이었습니다.
이 문제로 베드로와의 갈들이 있었다고 말하므로 초대 기독교에서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파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받아 들인 이후에도 할례를 해야 하며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이방인이 기독교인이 되려면 세례만이 아니라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정의하며 이 다른 복음이 갈라디아 성도들을 교란한다고 말합니다(1:6-7).
바울은 교회에 들어온 다른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 할례와 율법이 가미된 것에 대해 올바르게 가르쳐야 할 필요를 알리고 복음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율법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3:10).
그러다면 죄를 더하려고 주어졌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백성들이 죄를 지으므로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서 주어진 것입니다(3:19).
율법은 해방이 아니라 가두는 것입니다(3:23).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 죄를 인식하고 자신이 갇혀 있는 것을 알게 된 자들이 해방을 소망하게 되는 것인데, 율법은 죄에서 해방(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선생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3:24).
그 다음 바울은 율법과 언약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 예로 아브라함의 아들 중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사라에게서 난 이삭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 비유는 하갈의 신분에서 나타나는 데 하갈은 종이었고 사라는 자유자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율법은 종의 역할을 하여 멍애를 씌우지만 복음은 자유를 준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구분하는 것은 종의 멍에를 씌우는 율법을 통하여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서 끊어진 자이며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정의합니다(5:4). 그리고 그리스도가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5:2).
뿐만 아니라 율법 아래에 사는 자들은 육체를 자랑하는 자인데 그들은 율법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 것을 이루지 못하고 서로 분쟁하는 자가 된다고 말합니다(5:14-15).
반면에 복음 아래에 있는 자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으며, 육체를 위한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5:25).
여기에서 이 편지를 받는 대상은 갈라디아의 교인들이었지만, 그 교인들 가운데는 유대적 신앙을 가진 사람과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이 둘은 한 부류(할례와 율법준수를 주장하는)는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며 또 한부류,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속죄함을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심은대로 거둔다고 말합니다(6:7).
여기에서 심는 것은 두가지입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것과 성령을 위해 심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것과 영생을 거두는 것으로 나누어집니다(6:8).
앞에서 설명한 것과 연관하여 이해하자면 육체를 위해 심는 것을 자신의 몸에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의 의를 드러 내려고 하는 행위들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심는다는 것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있는 것을 복음으로 알고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자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6:14).
그럼으로 여기에서 ‘심는다’는 것은 믿음의 성도들의 신앙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속해 있는가? 아니면 율법에 속해 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처음에 의문을 가졌던 것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 의문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육체를 위해 심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칼빈주의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교리적으로 갖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에서는 그 교리에 대한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답을 찾는 것은 포기하였습니다.
다만, 육체로 심는 자든지 성령으로 사는 자이든지 서로 분쟁하여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가르침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성령으로 사는 자들은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복음의 선생들은 서로 짐을 지며,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고, 자기 자신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돌아 보아야 합니다(6:1-5).
결국 교회에는 두부류가 모두 존재하므로 누가 육신의 사람이며 성령의 사람인가를 가릴것이 것이 아니라 복음에 대해 바로 가르치며 서로 덕을 행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니 할례나 율법을 가지고 육신의 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십자가 복음 아래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니 이런 분쟁으로 사도 바울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결국 Y교회 C목사는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을 십일조와 헌금으로 결론을 맺었고, ㄱㅂㅅ 목사는 성도의 성공적인 삶을 이야기 했으며 박윤선 목사는 성도의 봉사와 복음을 위한 희생이라고 이야기 하였지만, 본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를 믿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궁금해 하였던 성령으로 난 자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마지막 심판에서 썩을 것을 거둘 것인지 영생을 거둘 것인지 하나님 앞에서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