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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소리단소리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기독교 배타주의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기독교 배타주의
 
 
1.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명박 정권의 등장 이후 불교계의 심기가 매우 불편한 것 같다. 불교계는 공직자들의 종교편향이 도를 넘었다고 판단하고 도심시위를 통해 행정부 수장의 공식 사과와 종교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였다. 불교계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최고통치자의 유감 표시와 공무원 복무규정 개정의 약속 등을 통해 불교계의 불만이 어느 정도 수그러든 감이 있지만 이 문제가 완전히 해소된 것 같지는 않다.

이번 사건은 공직자들의 기독교 편향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동안 기독교인들에 의한 전통문화 파괴나 타종교 상징물 훼손은 적지 않았다. 대학 캠퍼스에서의 장승파괴, 사찰이나 캠퍼스에 안치된 불상 훼손, 공공장소에 설치된 단군상 훼손 등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수많은 사건이 있었다. 우리사회에서 일어나는 종교 갈등의 현장에는 개신교가 거의 항상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개신교는 한국사회의 ‘문제아’로 간주되곤 한다. 안티기독교 운동의 등장이 이와 관련되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타종교의 상징물 파괴에서부터 공직자의 종교편향, 나아가 작년의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 사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사태에는 개신교의 적극적 선교활동이 관련되어 있다. 이는 ‘복음 전파’를 지상명령으로 삼는 기독교 전통의 산물로 볼 수 있지만 한국 개신교에서 배타주의가 눈에 띄게 나타나는 것은 왜일까? 한국 개신교 배타주의의 뿌리 깊은 지속성과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한국 근현대사와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것이 지닌 자기-타자인식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을 띠고 있는가?

2. 폭력적 배타주의라는 종교현상은 기독교의 본성이 아니다. 다만 역사적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특정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발현된 것이다.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 사냥 등 역사 속에 등장한 폭력적 배타주의는 기독교가 특정한 사회문화적 환경과 만나면서 발생한 병리적 현상이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 배타주의도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한국 개신교의 뿌리는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다. 초기 선교사의 대부분은 19세기 말 부흥운동과 기독교 문명론의 세례를 받고 입국한 자들이고 이들의 신앙과 신학은 온건한 형태의 ‘복음적 신앙’이었지만 이후 한국 개신교의 주류가 된 것은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이다. 근본주의란 용어는 20세기 초 미국 개신교 안에서 일어난 신학 논쟁 과정에서 등장한 <근본적인 것들(The Fundamentals)>(1910~1915)이라는 책자에서 처음 등장했다. 여기서 ‘근본적인 것들’이란 ‘성경무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대속’, ‘예수의 육체적 부활과 재림’ 등과 같은 당시 근본주의 진영이 확립한 교리다. 이러한 근본교리를 신봉하는 자는 ‘근본교리를 지키기 위해 세상과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자’, 구체적으로는 교회와 신학 속으로 이미 침투한 근대주의(modernism)·자유주의(liberalism)·세속주의(secularism)로부터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투쟁하는 자를 의미했다. 그러나 미국 근본주의 신학 진영은 자유주의 신학과의 논쟁에서 소수파로 전락하였고, 이후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는 신근본주의, 전투적 근본주의, 온건한 근본주의 등으로 분화되었다.

4. 미국 기독교 신학에서는 근본주의가 주변부로 물러났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근본주의 신학이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근본주의 신학이 한국 교회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물론 초기에 자유주의 신학이 거의 소개되지 못했다는 점이 중요한 요인이겠지만 근본주의 신학이 한국인들에게 적극 수용될 수 있었던 요인은 다른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국 근현대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신교 수용 초기 한국의 독특한 사회정치적 상황이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을 적극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닐까? 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무렵 한국 사회는 전쟁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1894년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 10년 뒤에 다시 터진 러일전쟁은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민중들의 삶을 황폐화시켰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연이어 벌어진 이러한 전쟁은 서양종교인 기독교의 ‘힘’을 부각시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당시 민중들은 전쟁의 와중에서 일본군대, 청나라 군대, 러시아 군대가 미국 성조기가 걸려 있는 교회나 선교사 거주 지역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러한 전쟁 체험을 통해 한국인들은 미국의 종교인 개신교의 ‘힘’을 절감했고 이는 교회로 신자를 끌어 들이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전쟁 체험이 민중들을 교회로 끌어 들이는 역할을 했다면, 이후에 급속하게 전개된 식민지화 과정과 국권상실 이후 식민지하의 암울한 상황은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의 근본주의 신학은 현실개혁과 사회참여보다는 죄의식과 죄의 고백에 강조, 내세에 대한 열렬한 믿음,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등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식민지하의 암울한 삶을 살아가던 민중들에게 위안을 주면서 호소력 있게 다가왔다. 이러한 근본주의 신학과 신앙은 일제 말엽의 혹독한 상황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교회 안에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해 갔다. 
 
5. 앞서 언급했듯이 근본주의 신학이 선교 초기부터 부각된 것은 아니다. 선교 초기에는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과 근본 교리가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생경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이질성은 개신교 선교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서구 근대문명을 선교의 도구로 삼았다. 그들은 근대문명이 산출한 ‘근대주의’(근대적 가치)가 아니라 근대문명의 ‘물질적 성과’를 선교의 방편으로 활용하여 개신교에 ‘문명의 종교’라는 후광을 입혔다. 이러한 문명화 선교는 서구문명의 우월성에 입각한 문명/야만의 이분법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이분법 하에서 한국사회의 전통적 관습과 문화는 타자화되었다. 당시 개신교 잡지에 자주 등장한 ‘구습타파’의 구호는 이러한 기독교문명론의 산물이었다.

‘구습타파’가 문명·야만의 이분법에 근거한 타자화 전략이라면 이 시기 개신교 선교의 현장에 자주 등장한 ‘우상타파’의 구호는 유일신 신앙에 근거한 타자화 전략이었다. 유일신 신앙의 언어에서 볼 때 한국인들의 전통적 신앙은 대부분 우상숭배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조상의 위패나 무덤 앞에 절하는 유교식 조상제사, 불상 앞에 절하거나 제물을 봉헌하는 행위,  도교나 민간신앙에서 등장하는 모든 의례는 ‘귀신예배’나 ‘악마숭배’와 같은 우상숭배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초기 개신교 배타주의는 기독교문명론에 근거한 ‘문명·야만의 이분법’과 유일신 신앙의 관점에서 전통문화와 전통종교들을 ‘미신’과 ‘우상’의 범주로 설정하면서 ‘종교’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요컨대 초기 개신교는 문명, 과학, 종교의 이름으로 전통문화와 전통종교를 야만, 미신, 우상으로 표상하는 타자배제의 전략을 구사하면서 스스로를 근대 문명에 부합하는 ‘참 종교’로 명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6. 1900년대 대부흥운동을 분기점으로 개신교 배타주의는 방향을 바꾸어 분출하기 시작하였다. 선교 초기의 개신교는 문명화 선교의 패러다임에 따라 구습타파, 개화와 계몽, 구국 등을 주요 슬로건으로 제시하였지만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죄의 고백과 회개가 강조되고 교회의 조직화와 교회보호가 주된 과제로 설정되었다.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에 내재한 신학적 신앙적 특성이 식민지화라고 하는 한국사회의 역사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전천년주의에 입각한 재림과 개인의 영혼 구원, 내세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리고 교회의 정치개입이나 독립운동을 금하는 정교분리원칙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교회조직의 정비와 전도 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선교 50주년을 맞이하는 1930년대에 접어들게 되면 교회 안에서 근본주의 신학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 시기의 근본주의는 문자주의적 성서 해석, 엄격한 교리주의, 가부장적 신앙 등을 특징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에 자유주의적 성서 해석, 체험을 중시하는 신비주의, 여성 교인의 권익 주장과 같은 내부의 타자들이 등장한다. ‘창세기 모세저작 부인 사건’(1934), ‘아빙돈 주석번역 사건’(1935), 각종 신비주의 운동과 신비주의 집단의 출현, ‘김춘배 목사 여권옹호 발언’(1934) 등은 이 시기의 근본주의 신학에 도전하여 일어난 대표적 사건들이다.

이러한 도전에 대하여 당시 근본주의 진영은 강력한 배타주의를 발동시켰다. 교권을 장악한 근본주의 세력은 성서비평에 근거한 성서의 시대적 재해석을 성서의 절대적 권위(성서무오설)를 붕괴시키는 위험한 해석으로 비판하고, 형식화된 신조나 교리보다는 직접적인 체험을 중시하는 신앙 집단을 위험한 신비주의 집단으로 공격하고,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언권 요청을 부당한 요구사항으로 비판하였다. 내부의 타자들에 대한 근본주의의 이러한 배제의 정치는 물론 정통/이단의 이분법을 통해 행사되었다.
 
7. 개신교 근본주의에 나타난 이러한 자타인식의 이면에는 ‘구별된 자’ 혹은 ‘구원받은 자’라는 자의식이 작동하고 있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자의식은 공동체 내부의 결속을 가져오지만 외부에 대해서는 강한 배타성을 분출하는 원천이 된다. 이 시기의 타자인식에는 윤리적/미학적 표상도 생산되고 있다. ‘미혹하는 자,’ ‘불쾌감을 주는 자,’ ‘거짓 신자,’ ‘불결한 악인,’ ‘죄악과 마귀의 궤계,’ ‘마귀의 종’ 등과 같은 온갖 부정적 메타포들은 ‘거짓’이라는 윤리적 판단과 ‘불결’이라는 미학적 표상들로서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분기점으로 작동하였다.
개신교 근본주의는 ‘성도’와 ‘외인’이라는 이름짓기(naming)를 통해 ‘순수한 우리’와 ‘타락한 그들’이라는 엄격한 이분법을 작동시켰다. 이러한 차별의 장치는 근대적 이분법의 메커니즘과 유사하다. 서구 근대의 인간 이해에는 합리적 주체를 항상 타자와 대립시키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내재한다. 그러한 인식론 속에서는 타자가 없는 주체는 입증될 수 없으며 주체가 입증되기 위해서는 타자가 끊임없이 생산되어야만 한다. 이런 경향은 인간 내부에까지 적용되어 자기 내부에서도 타자성의 영역이 설정된다.

외부와 내부에서 순수와 오염, 순결과 불결을 끊임없이 구별해내는 이러한 분류체계 속에는  매우 폭력적인 메타포들이 내재하고 있다. “한 군사의 날카로운 칼로 불공대천 원수 사탄, 억만 마귀 베일 때에 한 명인들 용서할까, 승전하고 개가하세 기쁘고도 즐거워라”는 어느 찬미가의 구절에는 정복주의와 승리주의가 엿보인다. 이러한 정복주의적 승리주의 의식은 개신교 근본주의의 전투적 성격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찬미가는 언어, 표상, 상징의 차원에서 전투적이고 폭력적인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지만, 이는 행동코드의 지시에 따라 언제든지 실제적인 행위로 표출될 수 있다. 상징은 인간의 잠재의식에까지 깊이 뿌리내린 사고의 표현이며, 특히 종교적 상징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창조하여 심리적 혹은 정치적으로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을 고려해 볼 때 한국 개신교의 전투적 세계관이 상징적 영적 차원에 국한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최근 한국 개신교의 공격적인 선교 지상주의가 배태한 잠재적인 종교 갈등과 개신교내의 권위주의적 성격에는 이러한 전투적 세계관의 영향이 깃들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기는 십자가, 우리의 전술은 성서, 우리의 대장은 예수 그리스도이다”라는 글에서도 공격적이고 군사적인 메타포가 잘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전투적 세계관은 창가나 찬송가, 설교를 통해 공동체 외부에 존재하는 적과 자신의 내부의 적을 끊임없이 생산하여 분리해내는 양자택일의 이분법적 인식틀을 강화시킨다. 지속적 반복적으로 이러한 메시지에 노출되면 언제든지 악을 완전 소멸시키는 전쟁에 뛰어들 수 있는 순교자의 신앙이 몸에 각인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군사주의적 가치를 자신의 몸에 새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매순간을 악과의 전쟁을 치르는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일상적 삶 자체에서 전장이 준비되고 있다. 모든 마귀를 쓸어버려야 태평안락을 얻는다는 믿음과 세계 곳곳에 신자들을 파송한다는 선교관은 공동체 외부에 대해 증오심을 키우는 이데올로기적 신앙적 장치이다.

이러한 담론의 특징은 제거해야 할 악을 우리 ‘외부’에서 찾는다는데 있다. 외부에 악과 마귀가 있다는 인식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마귀와 악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장치는 외부의 악에 집중함으로써 우리 내면의 악을 은폐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타자를 마귀로 몰아세움으로써 자신은 마귀가 아님을 입증하는 방식이다. 이 메커니즘 속에서는 심리적이건 물리적이건 타자에 해를 입히면서도 자신의 가해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진리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정의의 사도로 자기 자신을 미화할 뿐이다.

8. 해방 이후 개신교 근본주의의 주요 타자로 등장한 것은 공산주의와 북한 정권이며 미국은 선망과 모방의 대상으로 부상하였다. 친미-반공 이데올로기는 한국 개신교의 신앙고백이자 교리로 승격되었다. 물론 한국 개신교의 반공주의는 미국 개신교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자 미국 근본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무신론적이며 반성경적이라는 이유로 ‘적그리스도’ 혹은 ‘붉은 용’으로 표상하면서 강력한 반공주의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러한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정서는 1950년대 매카시 열풍과 맞물리면서 미국 사회를 광적으로 몰고 갔다. 전투적 근본주의자들의 적극적 동조가 없었더라면 미국 사회에서 ‘빨갱이 사냥’은 불가능했었을 것이다. 미국을 ‘이상적 타자’로 욕망하는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에게 이러한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정서는 그대로 수용되었고 친미는 곧 반공을 의미하였다.

  한국사로 눈을 돌려보면 식민지 시대에 이미 공산주의에 대한 개신교의 부정적 인식과 태도가 발견된다. 1920,30년대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 운동과 반기독교운동, 만주와 노령 등지에서 공산당의 박해에 의한 기독교인의 순교는 공산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부정적 태도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러나 공산주의에 대한 배타적 의식이 종교적 신조나 교리 차원으로 끌어 올려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6.25전쟁이다. 협소한 공간에서 3년이란 장기간 동안 같은 혈연공동체 사이에서 벌어졌던 한국전쟁의 고통지수는 상상을 불허한다. 전쟁의 깊은 상흔은 심리적 외상(trauma)으로 신체에 깊이 각인되었다. 주디스 허먼(Judith Lewis Herman)에 따르면 심리적 외상을 입은 사람은 기억이나 망각의 해법으로 고통을 견디는데 대개의 사람들은 망각의 해법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전쟁 이후 냉전이 고착화되자 남북한의 군사정권은 전쟁의 상흔을 끊임없이 기억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증오의 정치학’을 작동시켰다. “상기하자 6.25, 무찌르자 공산당!”이라는 표어가 말해주듯 상흔은 증오의 정치학으로 인해 끊임없이 현재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저항의 에너지를 ‘반공’에 투사시켰다.

  이러한 증오의 정치학이 작동하는데 개신교가 큰 역할을 하였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자라는 월남 개신교인들의 해석된 기억과 “공산화된다면 제일 먼저 죽을 사람들은 목사들이며 크리스찬들”이라는 ‘빨갱이’에 대한 증폭된 두려움이 한국교회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고양시키는 주요 자양분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반공이 종교적 신조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근본주의적 교회에서는 공산주의와의 대화나 공존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9. 2003년 3월 1일 반핵반김자유통일국민대회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개신교 목사들이 목이 쉬도록 외쳤다.

“미친개 김정일 처단 2000만 북한동포 탈출!” “외신기자들과 미 대통령 부시와 미국의 상하원의원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도록 ‘영어’로 기도합시다!” “미국은 우리의 혈맹입니다. 우리는 미국을 사랑합니다. 아이 러브 유 유에스에이! 아이 러브 유 아메리카!” “통성기도만이 미국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쓰러질 때까지 우십시오. 미국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비명 속에는 ‘정복대상인 타자, 북한’과 ‘욕망대상인 타자, 미국’이라는 한국 개신교의 이중적 타자인식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선/악, 미국/북한, 하나님/사탄, 보수/진보, 우익/좌익, 애국/반역, 더 노골적으로는 기독교인=친미, 사탄의 꼭두각시=반미라는 기괴한 이분법적 도식들이 타자에 대한 부정적인 메타포를 생산하고 있다. 북한-공산주의를 지칭하는 적그리스도, 사탄, 악의 화신이라는 메타포들은 타자에 대한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인식론적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는 마니교적 선악 이원론, 전천년주의 종말론에 영향받은 사탄의 음모론, 사탄과의 싸움에서 미국이 감당하는 주도적 역할에 대한 믿음, 근본주의적 성경무오설과 문자적 성경해석 등의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다.

  최근 우리사회에서는 탈냉전의 기류가 일상화되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여전히 냉전적 사유가 유효하다. 사회전반에서는 미국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급격히 달라져가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의 숭미적 에토스는 변함없다. 교회 안의 숭미-반공주의는 신앙심을 증폭시키는 장치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지금 여기, 서울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대규모의 반공친미 집회, 그때마다 태워지는 인공기와 나부끼는 성조기, 한국인 앞에서 영어로 설교하는 한국인 목사, 아멘으로 열렬히 호응하는 신자들....이러한 황당한 시츄에이션은 몇 차례 반복되고 그치는 해프닝이 아니다.

10. 1987년 민주화투쟁 이후 한국사회는 정치 영역의 민주화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차원의 민주화를 경험하면서 문화적 다원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시민사회 담론의 활성화와 시민사회 운동의 확산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의 산물이다. 사회문화적 다원주의의 확산은 권위주의 시대의 냉전 이데올로기인 반공주의의 약화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권위주의 시절에 억압되었던 사회문화적 소수집단의 목소리를 수면 위로 부상시키고 있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빠른 속도로 민주화, 다원화되어 가고 있지만 한국 교회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는 권위주의 시대의 에토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개신교의 위기로 표출되고 있다. 개신교 위기의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내적으로는 교회성장의 감소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으며 외적으로는  교회가 시민사회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개신교에 대한 시민사회의 도전은 안티기독교 운동을 통해서 우선적으로 표출되었다. 2000년대 초반 개신교인에 의한 단군상 훼손 사건이 발생하자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개신교를 비방하는 글이 삽시간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인터넷에서는 여러 개의 안티기독교 사이트가 개설되고 그 사이트들에서는 단군상 훼손만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를  비난하는 글들이 수없이 올라왔다. 개신교는 타종교의 존재를 무시하면서 공격적인 선교활동을 펼친다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비난 내용이었다. 요컨대 개신교 배타주의가 주된 공격 대상이었다. 안티기독교 운동은 점점 확산되다가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을 통해 그 실체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 사건의 핵심은 탈레반에 의한 한국인 피랍이었지만 당시 인터넷에서는 한국 개신교인들의 무분별한 해외선교활동에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던 것이다.    

  얼마 전 지하철공사가 차량 안에서 승객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를 ‘구걸’이나 ‘상행위’와 동일한 차원의 규제 대상으로 지정한 것도 개신교의 선교 행위가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공공장소에서 무분별하게 행해지는 개신교의 선교 활동은 이미 선교자유의 한계를 넘어 시민의 사생활과 권리를 침해하는 오만한 행위로 비쳐지고 있다. 이는 개신교 배타주의의 산물인 동시에 그것이 처한 위기를 보여준다. 

  지방자치제의 실시와 더불어 지방자치 단체들은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전통문화를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전통종교나 민간신앙과 관련된 몇몇 요소들이 전통문화 복원의 차원에서 활용되거나 개축되고 있다. 그런데 개신교계가 이러한 사업들이 특정 종교를 지원하거나 미신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 사업들에 대한 국고지원 금지를 요구하면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서도 전통문화에 대한 개신교의 편협한 배타주의가 작동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북한에 대한 ‘햇볕정책’이 지속되면서 냉전주의적 태도가 약화되자 개신교 보수 진영은 배타주의적 냉전 이데올로기를 다시 강화하고 있다. 한기총, 기독교뉴라이트연합, 기독당과 같은 개신교 보수진영의 단체들은 시국집회와 같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반북반김, 좌경세력 척결, 미군철수 반대 등을 요구하고 있다. 시민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냉전체제하에서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종교권력의 몸짓으로 비쳐질 뿐이다.

민주화 이후 수면위로 부상하기 시작한 소수자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개신교 근본주의는 배타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개신교 근본주의 진영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소수자의 인권 보호 차원이 아니라 정통과 이단의 이분법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동성애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성차별금지법 제정 문제에 있어서도 편협한 도덕주의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동남아 지역에서 쓰나미나 지진 등의 거대한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이를 이교도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이라고 해석하는 어느 대형교회 목사의 설교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에 내재한 배타주의가 어느 만큼 위험한 수위에 와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1. 이처럼 무수한 타자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배제하는 개신교 배타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개신교 근본주의는 최근 자신들이 직면한 위기상황을 정치세력화와 종교권력화를 통해 극복하려고 하지만 이는 위기를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또한 포용적 제스처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개신교의 위기는 세력화가 아니라 위기를 초래한 배타주의 자체에 대한 심층적 자기성찰을 통해서만 그 극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고 나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독선적 자의식을 성찰대상으로 삼는다면 배타주의적인 태도의 극복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숙진/ 성공회대 한국교회사 초빙교수



▲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가 개최한 '한국기독교의 배타주의-근원과 현상'에서 이숙진 교수가 '한국 교회사에서 기독교 배타주의'에 관해 발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