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내용은 이수애교수(목포대학교 국민윤리교육과)가 1991년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 발행 도서문화 제9집"의 '마을 공동체 내의 종교적 갈등' 이라는 제목으로 발료된 자료에서 발췌한 것이다.
(중략)
1920년대에 이미 청산도 당리에 기독교가 보급되었고 현재(1991년)는 7개 마을에 교회가 설립되어 있으나 대부분 80년대 세워진 교회로 신도수는 아직 매우 적은 편이다. 서남해 도서지역에서는 마을의 공동의례인 당제가 이미 소멸되어 버린 경우가 많은데 청산지역에서는 아직 대부분의 마을에서 당제가 수행되고 있으며 초분과 같은 습속도 아직까지 폐지되지 않고 있어 새로 유입된 기독교와 갈등을 빗고 있다.
(중략)
전통신앙
전통신앙이란 오랜 세월을 두고 민중 속에서 신봉되어져 온 자연종교로서 무속신앙과 유고에 기초하고 있는 조상의례를 비롯하여 세시퐁속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민속화된 신앙형태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조사대상지역(도청리, 지리, 모서리)의 제보자들은 현재 자신들의 전통신앙을 대표할 만한 관행으로는 '당제', '조상제사', '초분' 등을 꼽았고 따라서 전통신앙의 현황은 그러한 관행들을 중심으로 파악하였다.
(중략)
이 마을(도청리)에서는 당제가 중요한 마을 행사로 지속되고 있다. 교인들을 제외하고는 당제에 대해서 별다른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모든 제보자들은 당제 후에 마당밟기가 얼마나 성대히 치루어지는가에 대해서 특협히 강조하여 말하곤 하였다.
이 마을의 당제는 마을 북쪽에 위치한 당산에 있는 당나무 아래서 치루어진다. 약 350년 쯤 되었다고 전해지는 두그루의 당나무는 당제의 대상인 당산할머니와 당산할아버지를 상징하는 자연물이다. 당제는 음력 정월 초하루 저녁 8시 경부터 시작된다.
당제를 모실 제주(祭主)는 마을 이장이 중심이 되어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따져 선출한다. 제주는 언제나 남자가 되며 5,60대가 주로 선정이 되는데 생기복덕을 엄격하게 따지다 보니 제주를 연임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제주가 당제를 소홀히 지내면 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가정에도 우환이 생긴다는 마음의 부담을 안고 최대의 정성을 기울이게 된다. (중략) 제주에게는 수고에 대해 마을에서 주는 보상이 따른다. 예전에는 밭 180평을 농사를 짓도록 빌려 주었는데 최근에는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이 줄어들기 때문에 수고비와 당제에 쓰일 제수(祭需)비용을 현금으로 지급하며 그 비용은 마을 총회에서 결정하고 마을공동기금에서 충당한다. 도청리의 마을공동기금은 주로 당제 후에 있는 마당밟기를 통해 모금된다.
제주로 선정된 사람은 제를 무사히 모실 수 있도록 부정타지 않도록 조심을 하고 마을 사람들도 제주가 부정타지 않도록 최대한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며 만일 제주가 부정타는 일을 하게 되었을 경우 제주는 다시 선정하기도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정타지 않기 위한 금기사항이란 주로 '개고기 먹지 않는 것', '성관계를 피하는것', '상가는 출산한 집에 가지 않는 것' 등을 말한다. 당제일에는 마을 사람들의 부정이 제주에게 옮겨질 수 있다고 믿어 당터 인근의 길을 통제하여 마을민의 출입을 금한다. 출산의 부정은 매우 엄격히 지켜져 정초에 출산하게 될 경우에는 다른 마을에 가서 아이를 출산해야 한다. 어떤 이는 출산의 부정을 피하기 위해 친정이 있는 마을로 가는 도중 길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제주는 도움없이 혼자서 제물을 당(堂)까지 운반하고 당할머니나무와 당할아버지나무를 띠로 묶어 판자를 올려놓은 다음 그 판자 위에 제물을 진설한다.
제의 절차는 간단하다. 제물을 진설한 후에 술을 올리고 축문을 읽은 다음 축문이 적힌 종이를 불에 태워 올리는 소지(燒紙)로서 마친다. 당제를 통해 제주는 '한 해 동안 마을의 모든 병을 없애주고 동네사람 무사하게 지켜줄 것'을 마을수호신인 당할머니와 당할아버지에게 기원한다.
당산에서 치루어지는 본제사가 끝나면 이에 바로 이어 마을사람들은 직접 바닷가로 나가 바닷고사를 지낸다. 이 때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을 농악대가 앞장을 선다. 마을 사람들은 미리 준비해 놓았던 헌식용 제물들을 바다에 던지며 잡귀신이나 물귀신들을 위로하고 달랜다. 당산제가 마을의 수호신에게 드리는 제사라면 바닷고사는 마을의 안녕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잡귀들을 달래기 위한 제사라고 할 수 있다.
바다에 헌식이 끝나면 바로 마당밝기가 시작되는데 마을의 가구수가 많아서 3~4일 동안 계속된다. 농악대가 집집마다 방문하여 각종 가택신(家宅神)에게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고 각 가정에서는 음식과 술을 대접하고 또 쌀이나 현금을 마을 기금을 위해 내놓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상당한 금액의 돈을 헌납하기도 한다. 마당밟기가 시작되면서 제주집에서는 마을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나눠먹는 음복이 시작된다. 이 음복에는 자신이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교인들은 참여하지 않는다.
이 마을에는 아직도 초분의 습속이 지며지고 있다 초분의 필요성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나 현재에도 유언을 통해 반드시 초분을 써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즉 시신이 잘 육탈이 된 후에 뼈만 선산에 묻히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또한 정월에는 땅에 손대면 안된다는 믿음 때문에 반드시 초분을 하는 등 초분의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중략)
기독교
청산도에는 1920년대 당리라는 마을에 맨 먼저 기독교의 복음이 전해졌다. 당리에는 목포를 왕래하면서 상점을 운영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목포에 있는 선교사로 부터 얻어온 성경을 형제들에게 보여주었고 그 성경을 읽은 형제들의 요청으로 장로 한사람이 당리에 파송되어 식자(識者)층을 중심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가정예배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복음이 전파된 이후에 교회는 주민들에게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처음 파송된 장로는 문둥병환였다고 알려지고 있고, 다음에 파송된 전도사의 경우에는 아들이 죽고 부인은 정신이상이 되는 바람에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한 탓이다. 그리고 교인들 중에는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있어 때로는 공산주의자로 오해를 받는가 하면, 한국전쟁 당시 교인이라고 수난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던 주민들에게 기독교는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종교로 느껴졌다. 1970년대 보건소 공의였고 권사직분을 맡았던 신도 한 분이 주민들에게 신임을 받게 되면서 교회나 교인에 대한 이미지가 다소 개선되어졌다.
현재 교회를 맡고 있는 목회자는 이곳에 부임했던 목회자 중 처음으로 정규신학대학을 좋업한 사람이다. 1986년에 이곳 교회에 부임할 당시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이라기 보다 무관심하거나 거부감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현 목사는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해서 해택을 줄 수 있는 일을 추진하여 교인들에 대한 새로운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동기에서 1988년 부터 축양사업(광어양식)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워낙 많은 자금과 노력이 요구되는 사업이라 목회자로서 관여할 수 있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운영을 맡기고 있다. 그러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목회자에 대한 비난의 소리도 많았지만 새로운 이미지를 심는데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가 교인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올 해 초부터(1991년) 교회는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데 목사 자신의 영적인 성장과 더불어 목사 부인이 받은 '신유의 은사'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 있었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자신에게 신유의 은사가 내린 것을 알게된 목사 부인은 교인들을 위해 신유의 기도를 베풀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병에 차도가 있었던 교인들의 입을 통해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지자 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신유의 기도를 받기 위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병고침을 받은 여러가지 사례들을 통해 구체적인 체험을 얻게 된 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되고 신앙생활도 매우 적극적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비신도들의 교회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교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나 편견도 조만간에 불식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부임 당시 20여명이었던 성인 교인 수가 지금은 약 80명으로 증가하였다. 교인들의 연령은 여러층에 분포되어 있고 남녀의 수가 비슷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마을의 유지로 손곱힐만한 사람들 중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없다.
지리마을에는 1984년 교회가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마을회관을 빌려서 교회로 사용하다가 1년 반 후에 지금의 교회를 신축하였다. 이 마을 주민 중에는 교회가 들어오기 전부터 도청리교회에 다니고 있던 50대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육지에 나가 사는 자녀들이 독실한 기독교인들로 자녀들의 영향으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교회가 들어온 후 1년이 될 때까지 교인 수가 계속 증가하여 20여명 정도 되었는데 교회 건물을 짓고 난 후부터 교인이 줄기 시작하여 작년(1990년)까지만 해도 교인 수가 10명 미만에 그치고 전혀 늘어나지 못하다가 오해 초부터 다시 늘기 시작해 20명 정도가 되었다. 흔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무속신앙에 대한 애착이 많아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기 쉬우나 오히려 노년층이 많은 편이다.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된 특별한 동기로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건강이 나빠서 또는 중병에 걸려서 교회에 다닐 결심을 했고 그 차도가 있어 신앙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교인들로 부터 쉽게 들을 수 있는 간증의 내용이자 신앙의 동기였다. 그러한 구체적인 동기가 없는 경우에는 도시에 나가 생활하는 동안 기독교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거나 도시에 사는 자녀나 친척들의 권유를 받아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경우라 할 수 있다. 이 마을의 경우도 젊은층의 교인들은 타지에서의 생활경험이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모서리에는 1977년에 교회가 서게 되었다. 그 당시 마을 주민 가운데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살함은 없었으나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살함들이 몇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 교회를 받아 들일 것인가를 마을 주민 회의에서 논의했는데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 한 제보자의 말에 따르면 교회에 대한 이해가 없었으면서 쉽게 교회를 받아들인 이유는 모든 공공기관이 모동리에 세워지게 되자 모서리 주민들은 불만이 많았는데 교회를 공공기관의 하나로 생각하고 쉽게 허락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지리에서와 같이 마을회관을 1년 남짓 교회로 사용하다 예전에 당터였던 자리를 교회부지로 제공해 주어서 교회를 신축하였다.
교회가 들어온지 4년 정도 지나면서 교인은 6,70명까지 늘어났으나 한 중이 당터에 세운 교회 때문에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간 후부터 교인과 주민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교인도 점차 감소해 90년 초에는 45명 정도로 줄었다가 지금은 교인 수가 15명 정도이고 모두 여자들이다. 이처럼 교인 수가 현저하게 준 것은 80년 초에 비해 모서리의 인구가 현저하게 감소한 탓도 있겠으나 기존의 교인들 마저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은 마을 내에서 기독교와 전통신과의 갈들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본 연구조사는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에 속해 있는 3개 마을(청산도, 모도)에서 실시되었다.
(중략)
1920년대에 이미 청산도 당리에 기독교가 보급되었고 현재(1991년)는 7개 마을에 교회가 설립되어 있으나 대부분 80년대 세워진 교회로 신도수는 아직 매우 적은 편이다. 서남해 도서지역에서는 마을의 공동의례인 당제가 이미 소멸되어 버린 경우가 많은데 청산지역에서는 아직 대부분의 마을에서 당제가 수행되고 있으며 초분과 같은 습속도 아직까지 폐지되지 않고 있어 새로 유입된 기독교와 갈등을 빗고 있다.
(중략)
전통신앙
전통신앙이란 오랜 세월을 두고 민중 속에서 신봉되어져 온 자연종교로서 무속신앙과 유고에 기초하고 있는 조상의례를 비롯하여 세시퐁속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민속화된 신앙형태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다. 조사대상지역(도청리, 지리, 모서리)의 제보자들은 현재 자신들의 전통신앙을 대표할 만한 관행으로는 '당제', '조상제사', '초분' 등을 꼽았고 따라서 전통신앙의 현황은 그러한 관행들을 중심으로 파악하였다.
(중략)
이 마을(도청리)에서는 당제가 중요한 마을 행사로 지속되고 있다. 교인들을 제외하고는 당제에 대해서 별다른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모든 제보자들은 당제 후에 마당밟기가 얼마나 성대히 치루어지는가에 대해서 특협히 강조하여 말하곤 하였다.
이 마을의 당제는 마을 북쪽에 위치한 당산에 있는 당나무 아래서 치루어진다. 약 350년 쯤 되었다고 전해지는 두그루의 당나무는 당제의 대상인 당산할머니와 당산할아버지를 상징하는 자연물이다. 당제는 음력 정월 초하루 저녁 8시 경부터 시작된다.
당제를 모실 제주(祭主)는 마을 이장이 중심이 되어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따져 선출한다. 제주는 언제나 남자가 되며 5,60대가 주로 선정이 되는데 생기복덕을 엄격하게 따지다 보니 제주를 연임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제주가 당제를 소홀히 지내면 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가정에도 우환이 생긴다는 마음의 부담을 안고 최대의 정성을 기울이게 된다. (중략) 제주에게는 수고에 대해 마을에서 주는 보상이 따른다. 예전에는 밭 180평을 농사를 짓도록 빌려 주었는데 최근에는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이 줄어들기 때문에 수고비와 당제에 쓰일 제수(祭需)비용을 현금으로 지급하며 그 비용은 마을 총회에서 결정하고 마을공동기금에서 충당한다. 도청리의 마을공동기금은 주로 당제 후에 있는 마당밟기를 통해 모금된다.
제주로 선정된 사람은 제를 무사히 모실 수 있도록 부정타지 않도록 조심을 하고 마을 사람들도 제주가 부정타지 않도록 최대한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며 만일 제주가 부정타는 일을 하게 되었을 경우 제주는 다시 선정하기도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정타지 않기 위한 금기사항이란 주로 '개고기 먹지 않는 것', '성관계를 피하는것', '상가는 출산한 집에 가지 않는 것' 등을 말한다. 당제일에는 마을 사람들의 부정이 제주에게 옮겨질 수 있다고 믿어 당터 인근의 길을 통제하여 마을민의 출입을 금한다. 출산의 부정은 매우 엄격히 지켜져 정초에 출산하게 될 경우에는 다른 마을에 가서 아이를 출산해야 한다. 어떤 이는 출산의 부정을 피하기 위해 친정이 있는 마을로 가는 도중 길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제주는 도움없이 혼자서 제물을 당(堂)까지 운반하고 당할머니나무와 당할아버지나무를 띠로 묶어 판자를 올려놓은 다음 그 판자 위에 제물을 진설한다.
제의 절차는 간단하다. 제물을 진설한 후에 술을 올리고 축문을 읽은 다음 축문이 적힌 종이를 불에 태워 올리는 소지(燒紙)로서 마친다. 당제를 통해 제주는 '한 해 동안 마을의 모든 병을 없애주고 동네사람 무사하게 지켜줄 것'을 마을수호신인 당할머니와 당할아버지에게 기원한다.
당산에서 치루어지는 본제사가 끝나면 이에 바로 이어 마을사람들은 직접 바닷가로 나가 바닷고사를 지낸다. 이 때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을 농악대가 앞장을 선다. 마을 사람들은 미리 준비해 놓았던 헌식용 제물들을 바다에 던지며 잡귀신이나 물귀신들을 위로하고 달랜다. 당산제가 마을의 수호신에게 드리는 제사라면 바닷고사는 마을의 안녕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잡귀들을 달래기 위한 제사라고 할 수 있다.
바다에 헌식이 끝나면 바로 마당밝기가 시작되는데 마을의 가구수가 많아서 3~4일 동안 계속된다. 농악대가 집집마다 방문하여 각종 가택신(家宅神)에게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고 각 가정에서는 음식과 술을 대접하고 또 쌀이나 현금을 마을 기금을 위해 내놓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상당한 금액의 돈을 헌납하기도 한다. 마당밟기가 시작되면서 제주집에서는 마을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나눠먹는 음복이 시작된다. 이 음복에는 자신이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교인들은 참여하지 않는다.
이 마을에는 아직도 초분의 습속이 지며지고 있다 초분의 필요성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나 현재에도 유언을 통해 반드시 초분을 써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즉 시신이 잘 육탈이 된 후에 뼈만 선산에 묻히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또한 정월에는 땅에 손대면 안된다는 믿음 때문에 반드시 초분을 하는 등 초분의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중략)
기독교
청산도에는 1920년대 당리라는 마을에 맨 먼저 기독교의 복음이 전해졌다. 당리에는 목포를 왕래하면서 상점을 운영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목포에 있는 선교사로 부터 얻어온 성경을 형제들에게 보여주었고 그 성경을 읽은 형제들의 요청으로 장로 한사람이 당리에 파송되어 식자(識者)층을 중심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가정예배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복음이 전파된 이후에 교회는 주민들에게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처음 파송된 장로는 문둥병환였다고 알려지고 있고, 다음에 파송된 전도사의 경우에는 아들이 죽고 부인은 정신이상이 되는 바람에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한 탓이다. 그리고 교인들 중에는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있어 때로는 공산주의자로 오해를 받는가 하면, 한국전쟁 당시 교인이라고 수난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던 주민들에게 기독교는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종교로 느껴졌다. 1970년대 보건소 공의였고 권사직분을 맡았던 신도 한 분이 주민들에게 신임을 받게 되면서 교회나 교인에 대한 이미지가 다소 개선되어졌다.
현재 교회를 맡고 있는 목회자는 이곳에 부임했던 목회자 중 처음으로 정규신학대학을 좋업한 사람이다. 1986년에 이곳 교회에 부임할 당시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이라기 보다 무관심하거나 거부감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현 목사는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해서 해택을 줄 수 있는 일을 추진하여 교인들에 대한 새로운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동기에서 1988년 부터 축양사업(광어양식)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워낙 많은 자금과 노력이 요구되는 사업이라 목회자로서 관여할 수 있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운영을 맡기고 있다. 그러한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목회자에 대한 비난의 소리도 많았지만 새로운 이미지를 심는데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가 교인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올 해 초부터(1991년) 교회는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데 목사 자신의 영적인 성장과 더불어 목사 부인이 받은 '신유의 은사'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 있었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자신에게 신유의 은사가 내린 것을 알게된 목사 부인은 교인들을 위해 신유의 기도를 베풀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병에 차도가 있었던 교인들의 입을 통해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지자 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신유의 기도를 받기 위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병고침을 받은 여러가지 사례들을 통해 구체적인 체험을 얻게 된 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되고 신앙생활도 매우 적극적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비신도들의 교회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교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나 편견도 조만간에 불식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부임 당시 20여명이었던 성인 교인 수가 지금은 약 80명으로 증가하였다. 교인들의 연령은 여러층에 분포되어 있고 남녀의 수가 비슷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마을의 유지로 손곱힐만한 사람들 중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없다.
지리마을에는 1984년 교회가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마을회관을 빌려서 교회로 사용하다가 1년 반 후에 지금의 교회를 신축하였다. 이 마을 주민 중에는 교회가 들어오기 전부터 도청리교회에 다니고 있던 50대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육지에 나가 사는 자녀들이 독실한 기독교인들로 자녀들의 영향으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교회가 들어온 후 1년이 될 때까지 교인 수가 계속 증가하여 20여명 정도 되었는데 교회 건물을 짓고 난 후부터 교인이 줄기 시작하여 작년(1990년)까지만 해도 교인 수가 10명 미만에 그치고 전혀 늘어나지 못하다가 오해 초부터 다시 늘기 시작해 20명 정도가 되었다. 흔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무속신앙에 대한 애착이 많아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기 쉬우나 오히려 노년층이 많은 편이다.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된 특별한 동기로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건강이 나빠서 또는 중병에 걸려서 교회에 다닐 결심을 했고 그 차도가 있어 신앙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교인들로 부터 쉽게 들을 수 있는 간증의 내용이자 신앙의 동기였다. 그러한 구체적인 동기가 없는 경우에는 도시에 나가 생활하는 동안 기독교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거나 도시에 사는 자녀나 친척들의 권유를 받아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경우라 할 수 있다. 이 마을의 경우도 젊은층의 교인들은 타지에서의 생활경험이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모서리에는 1977년에 교회가 서게 되었다. 그 당시 마을 주민 가운데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살함은 없었으나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살함들이 몇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 교회를 받아 들일 것인가를 마을 주민 회의에서 논의했는데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 한 제보자의 말에 따르면 교회에 대한 이해가 없었으면서 쉽게 교회를 받아들인 이유는 모든 공공기관이 모동리에 세워지게 되자 모서리 주민들은 불만이 많았는데 교회를 공공기관의 하나로 생각하고 쉽게 허락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지리에서와 같이 마을회관을 1년 남짓 교회로 사용하다 예전에 당터였던 자리를 교회부지로 제공해 주어서 교회를 신축하였다.
교회가 들어온지 4년 정도 지나면서 교인은 6,70명까지 늘어났으나 한 중이 당터에 세운 교회 때문에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간 후부터 교인과 주민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교인도 점차 감소해 90년 초에는 45명 정도로 줄었다가 지금은 교인 수가 15명 정도이고 모두 여자들이다. 이처럼 교인 수가 현저하게 준 것은 80년 초에 비해 모서리의 인구가 현저하게 감소한 탓도 있겠으나 기존의 교인들 마저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은 마을 내에서 기독교와 전통신과의 갈들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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